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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등 동남아, 中 수입·美 수출 물량 증가 美 4월 상호관세 발표 이후 中 우회수출 확대 트럼프, 무역협상서 동남아 주요국 압박 강화

미 정부의 대중국 고율 관세 조치 이후, 중국 기업들이 동남아시아를 경유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우회 전략’을 확대하고 있다. 우회 경로로 지목된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주요국은 상호관세 유예기간 중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이어가고 있지만, 미국은 원산지 규정 강화 등 중국산 제품의 우회수출을 직접 차단하라고 요구하는 등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제조업체들은 10%의 기본관세만 부과되는 이집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며, 새로운 ‘관세 회피 경로’ 확보에 나서는 모습이다.
中, 아세안 10개국 대상 수출 21% 증가
16일(현지 시각) 중국 세관에 따르면 올해 4월 중국의 대미 수출이 전년 동월 대비 21% 감소하며 하락세로 전환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관세를 발표하기 전인 지난 3월, 9.1% 증가했던 흐름과 대조된다. 반면 같은 기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을 대상으로 한 수출은 21% 늘었다. 증가 폭도 전월(3월, 12%)과 비교해 9%포인트 확대됐다. 국가별로는 △베트남 18.9%→22.5% △말레이시아-2.7%→14.9% △태국 27.8%→27.9% △인도네시아 24.6%→36.8% 등으로 대폭 증가했다.
이 같은 변화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9일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에 대해 상호관세를 90일간 유예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계기로 중국 기업들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부품을 조립한 뒤 미국으로 수출하는 ‘우회수출’ 전략을 본격화한 것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베트남의 경우, 미국의 상호관세 조치 이후 중국산 전자부품·기계류 수입이 각각 54%, 44% 급증했고 미국으로의 수출은 30% 이상 늘었다"며 "중국산 노트북,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이 동남아를 거쳐 미국으로 대량 수출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우회 전략이 한층 정교하게 진화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중국 기업들은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에 탑재된 미국산 AI칩을 사용하기 위해 데이터를 담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를 현지로 운반한 뒤, 현지 서버에 데이터를 직접 입력해 AI 모델을 생성하고 이를 중국으로 다시 가져오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수요가 늘면서 관련 장비 수요도 함께 증가했다. 대만 국제무역청에 따르면, 말레이시아는 3~4월 대만에서 총 34억 달러어치의 AI 칩과 기타 프로세서를 수입했는데, 이는 지난해 전체 수입 규모를 넘어선 규모다.

베트남, 관세 낮추려 美 요구에 적극 협조
다만, 상호관세 유예기간은 오는 7월 7일 종료된다. 만약 미국과의 합의가 도출되지 않는다면 베트남(46%), 인도네시아(32%), 태국(36%), 말레이시아(24%)에 대한 상호관세는 7월 8일 부활한다. 미 정부는 4월부터 시작한 해당국과의 무역협상에서 중국산 부품·원재료 비중 축소와 더불어, 중국산 상품의 수출 경로를 ‘직접’ 차단하라며 엄격한 원산지 규정 적용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별한 이유 없이 유예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며 유예기간 종료와 함께 각국에 관세율을 통보하겠다고 경고했다.
가장 큰 압박에 노출된 국가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중국, 멕시코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트럼프 대통령 집권 1기 당시에도 중국 내 생산기지 이전의 최대 수혜국으로 꼽혔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지난 4월 ‘메이드 인 베트남’ 인증 발급 및 수입품 심사를 강화하는 등 미국과의 무역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협조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팜 민 찐 베트남 총리는 “미국이 관세 협상에서 트랜스십먼트(환적)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며 “베트남 정부는 불법 우회수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도 미국과의 협상에서 중국산 우회수출 단속을 약속했다. 이들 국가는 미국산 제품 구매 확대, 비관세 장벽 완화 등을 제시하며 관세 인하를 유도하고 있다. 다만, 중국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에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이 동남아시아 지역의 최대 무역·투자 파트너라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균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동남아시아 주요국이 미국의 압박으로 실리와 안보, 주권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으면서 일부 산업에서는 양자택일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미 적자국 이집트, 새로운 우회경로 부상
이처럼 미국과 동남아시아 간 무역협상 속에서 대중국 교역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자, 중국의 제조업체들은 새로운 '관세 피난처'로 부상한 이집트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5일 "트럼프 행정부의 고율 관세와 동남아시아까지 확장된 무역장벽을 피해 중국 제조업체들이 최근 이집트로 생산시설을 대거 이전하고 있다"며 "이집트는 저렴한 인건비, 전략적 입지, 낮은 대미 관세, 친중 정책 등으로 ‘신흥 글로벌 제조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집트는 기본 관세가 10%에 불과한 데다 대미 무역수지 적자국이어서 추가 제재 가능성도 작다. 여기에 인건비가 월 100~150달러로 동남아시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생산비 절감 효과가 크고,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아프리카·중동 시장으로의 접근성도 뛰어나다. 미국과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관세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주요한 이점이다. 이 외에도 친중 성향의 정부 정책, 외국인 투자 인센티브, 안정적인 정치·치안 환경 등도 이집트 진출의 매력 요인으로 꼽혔다.
이집트 투자청(GAFI)에 따르면 현재 이집트에는 2,800개 이상의 중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2018년 1,200개에서 두 배 이상 늘어난 규모다. 누적 투자액도 80억 달러를 넘어섰다. 오포, 하이얼, 화웨이, 미디어, ZTE, GAC모터 등 대형 브랜드부터 부품·섬유·가전 제조업계의 중소·중견기업까지 다양하게 진출해 있다. SCMP는 "수에즈 운하 경제특구 내 중국 기업의 투자액만 30억 달러를 웃돈다"며 "의류·가전·철강·자동차 등 9개 부문의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이 지역에 집중됐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