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동아시아 흔들리는 역사 인식, 해법은 교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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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는 미디어가 역사 인식을 좌우 국경을 넘는 사료 기반 수업이 민족주의 확산 억제 사전 준비된 역사 교육이 갈등 재연을 줄이는 핵심 방안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 9월 15일 중국에서 개봉한 전쟁 영화 ‘731’이 기록적인 흥행을 거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다룬 이 작품은 개봉 첫날 3억 4,500만 위안(약 6,600억원)을 벌어들이며 전쟁 영화 사상 최대 규모의 성적을 올렸다. 개봉 당일 수백만 명이 관람하면서 특정한 역사 서사가 대규모로 확산됐다. 같은 시기 중국 전역에서는 만주사변 발발일(9월 18일)을 맞아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고 추모 행사가 이어졌다. 영화와 국가 의례가 겹치면서 과거사에 대한 감정은 집단적으로 고조됐다.
반면, 일본에서는 8월 15일 종전 기념일을 맞아 각료와 우익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들은 국내 보수층의 지지를 얻었지만, 한국과 중국의 항의를 불러왔다. 이러한 흐름은 과거사가 어떻게 각국에서 조직되고 정치적으로 활용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오늘날 필요한 질문은 일본이 충분히 반성했는가가 아니라, 한국·일본·중국의 교육 정책이 과거사 갈등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과거사 갈등, 미디어가 주도
역사 문제에 대한 여론은 고정돼 있지 않고 사회적 자극에 따라 크게 변한다. 중국의 대일 인식이 대표적이다. 2024년 조사에서 중국인의 87.7%가 일본에 부정적 인상을 갖고 있다고 답했으며, 이는 200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러한 인식은 교과서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이벤트와 외교 갈등, 시의적 콘텐츠가 결합하면서 증폭된다.

주: 부정적 인식 비율(X축), 연도(Y축)
영화 ‘731’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개봉 첫날 약 700만~800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홍콩 인구에 맞먹는 규모다. 같은 시기 일본 총리가 국회 답변에서 731부대 관련 자료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발언하자, 피해 경험을 기억하려는 이웃 국가의 시각과 괴리가 더 드러났다. 이 공백을 영화와 같은 대중 콘텐츠가 빠르게 채우며 여론을 움직인 것이다.

주: 날짜(X축), 흥행수익(Y축)
정치 현장에 드러난 과거사 논란
이 같은 인식의 충돌은 일본 정치에도 반영됐다. 종전 80주년이던 올해 8월, 각료와 차세대 정치인, 신흥 우익 정당 인사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고, 한국도 유감을 표명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지지층 결집 효과가 있었지만, 주변국과의 신뢰는 그만큼 약화됐다.
교육 정책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학생들은 감정을 자극하고 책임을 단순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따라서 과거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교실 수업이 미디어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서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교실보다 강한 스크린의 영향
한국의 대일 여론은 2023~2024년 사이 개선 조짐을 보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2%가 일본에 호감을 표해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2025년 중반 조사에서는 양국 국민의 25%만이 관계가 잘 되고 있다고 답했다. 이는 학교 교육에서 전달되는 역사 서술이 국민 여론을 안정적으로 지탱하지 못하고, 외교 현안이나 영상 콘텐츠, 정치 논란에 따라 쉽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역사 인식을 공유하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1년 한일, 2006년 중일이 각각 공동 역사 연구위원회를 구성해 보고서를 발간했지만, 성과는 교실과 대중문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학문적 성과가 사회적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영화와 SNS 같은 대중 콘텐츠를 대체하기 어렵다. 따라서 교육도 자료의 배포 방식과 접근 경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최근 영화의 흥행은 교육계에 뚜렷한 경고음을 울렸다. 수백만 명이 단기간에 특정 사건을 영화로 접하는 상황에서, 몇 달 뒤 교실에서 제시되는 반론은 이미 시기를 놓쳐 설득력이 떨어진다. 학생들에게 단순히 균형을 요구하는 방식은 효과가 없다. 오히려 영상 제작 과정에서 어떤 자료가 사용됐는지, 무엇이 생략됐는지, 역사학계의 주요 해석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순한 비판적 사고 교육이 아니라 전쟁사를 다루는 미디어 해석 교육이다.
이 과정은 상대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명확히 가르쳐야 한다. 동시에 오늘날 일본 시민, 특히 젊은 세대는 과거의 죄를 계승하지 않지만, 역사적 책임은 있다는 점도 함께 교육해야 한다. 이는 시민교육의 핵심이며, 과거사 논쟁을 정체성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문제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미래를 위한 역사 교육 설계
동아시아의 안보는 한국, 일본, 미국 3국 협력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기념일마다 책임 논란이 반복되면 지지는 약화된다. 이를 완화하려면 학생들의 현실에 맞는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
첫째, 세 나라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공동 사료 자료를 구축해야 한다. 일기, 재판 기록, 사진 같은 1차 자료를 디지털화해 각국 국립 아카이브가 공동으로 선별하고, 역사학자의 해설을 한국어·중국어·일본어로 제공한다. 공개 시점은 기념일에 맞춰 학교 수업에서 미리 다룰 수 있도록 한다.
둘째, 교사 교환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중등 교사를 일정 기간 서로의 학교에 파견해 논란이 적은 주제와 민감한 주제를 함께 준비하게 한다. 하나는 이민사처럼 논란이 적은 주제, 다른 하나는 강제노동이나 일본군 위안부처럼 민감한 주제다. 목표는 하나의 진실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증거를 다루는 방법을 공유하는 데 있다.
셋째, 평가 방식도 바꿔야 한다. 단순한 논술 시험 대신 영상·사진 등 다양한 자료를 활용한 과제를 통해 사건을 여러 시각에서 재구성하게 하고, 평가는 감정이 아니라 출처 검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자기 국가의 피해뿐 아니라 이웃 국가의 시각까지 학습할 수 있다.
이런 제안이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치가 언제나 교육보다 앞선다는 인식은 현실을 잘못 짚은 것이다. 교육이 힘을 잃은 이유는 과거사를 사회적 확산의 문제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는 이미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교육은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또한 전쟁 범죄와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가 충분치 않다는 비판은 오히려 지속적이고 일관된 교육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교육의 핵심은 검증 가능한 증거를 중심으로 학습을 이끄는 것이다.
정치의 유혹을 넘어서는 교육
일본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외교 갈등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국과 중국 정치인들도 반일 감정 자극이 손쉬운 정치 수단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기후변화, 과학, 안보와 같은 공동 현안에서 필요한 협력을 가로막는다. 여론이 일시적으로 개선되기도 하지만 시민적 기반이 약해 쉽게 흔들린다. 주변국을 적대적 상징이 아니라 학습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미래 세대와 지역 안보
과거사 갈등을 풀어내는 열쇠는 또 다른 사과가 아니라 교육이다. 정체성 논쟁을 반복하는 대신, 사료 검토와 다양한 해석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 당국은 공동 자료를 마련하고, 갈등이 고조되기 전에 이를 학교 교육에 반영해야 한다. 학생들에게는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근거에 기반한 학습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일본은 앞으로도 전쟁과 식민 지배를 어떻게 기념할지를 두고 논쟁할 것이며, 한국과 중국도 각자의 해석을 강조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된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협력의 기반을 넓힐 수 있다. 지역 안보와 시민 교육의 미래는 이러한 노력이 실제로 실행되는지에 달려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Hot Memory, Cold Politics: How the Emotional Intensity of Historical Memory in Japan, China, and South Korea Affects Political Dynamic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