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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산업 육성에 힘 쏟는 중동 국가들 사우디아라비아, 美와 'AI 동맹' 강화 WSJ "사업 축소·폐기 가능성, 지정학적 리스크 유의하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국가들이 인공지능(AI)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자국 AI 산업 육성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물론, 미국 등 AI 선진국과도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으며 경제 다변화에 박차를 가하는 양상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중동 지역의 투자 열기가 언제 사그라질지 알 수 없는 만큼, 수혜 기업들이 '경계 태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오일 머니' AI 산업에 속속 투입
17일 IT 업계에 따르면, 최근 중동 국가들은 석유 산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AI 산업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인공지능 및 첨단기술위원회(AIATC)를 출범하고, AI 분야에 1,000억 달러(약 136조1,500억원)를 투자하기 위해 투자 전문 회사를 세웠다. AI 및 기술 기업을 위한 세계 최대 규모 글로벌 허브 ‘AI 및 웹3(Web3) 인큐베이터’도 설립했으며, 오는 2031년까지 AI 분야 세계적 리더로 발돋움한다는 목표를 담은 ‘UAE 국가 AI 전략’도 발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중심축 삼아 AI 산업을 지원하고 있다. 비전 2030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2016년 발표한 경제 개혁 프로젝트로, 석유 중심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 경제를 데이터와 AI를 활용해 다각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부펀드(PIF)를 통해 AI 분야에 2019년부터 2029년까지 약 1,000억 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다. 해당 자금은 AI 관련 스타트업 지원과 AI 인프라 구축에 쓰인다.
중동 국가들은 미국을 비롯한 AI 선진국에 몸담은 기업들에도 막대한 투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아랍에미리트 정부가 지원하는 AI 투자 회사인 MGX는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MS), 블랙록 등과 함께 ‘글로벌 AI 인프라 투자 파트너십’(GAIIP)을 통해 300억 달러(약 40조원) 이상 규모의 펀드를 출범했으며, 오픈AI의 66억 달러(약 8조9,800억원) 규모 투자 라운드에도 참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공투자기금(PIF)은 미국 벤처캐피털 회사인 안드레센 호로비츠와 400억 달러(약 54조원)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하기 위해 협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美-UAE, AI 협력 확대
중동 지역 국가들과 미국의 'AI 동맹' 역시 나날이 공고해져 가고 있다. 지난달 15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은 아랍에미리트와 협력해 ‘미국 외 지역 최대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지어지는 이 데이터센터는 5GW(기가와트) 용량이며, 아랍에미리트 투자청이 설립한 AI 기업 ‘G42’가 건설을 주도한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미국 기업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AI 반도체 선두 주자인 엔비디아·AMD와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오픈AI·소프트뱅크 등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아랍에미리트와의 원활한 협력을 위해 'AI 확산 규정(dissemination rule)'을 폐지하겠다는 뜻도 드러냈다. 해당 규정은 전임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도입한 것으로, 타국을 3그룹으로 분류해 미국산 AI 칩 구매를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우선 미국과 핵심 동맹국을 포함하는 ‘이너서클’ 그룹(티어 1)은 미국산 AI 반도체 수입에 제한이 없다. 티어 1에는 ‘파이브아이즈(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참여국과 주요 서유럽국, 한국, 일본, 대만 등 18개국이 포함된다. 주로 남미와 중동, 동남아 국가들로 구성된 '중간지대' 그룹(티어 2)은 미국산 AI 칩을 구입할 수 있지만 나라별로 확보할 수 있는 최대치가 제한된다. 티어 3은 중국, 북한, 러시아, 이란, 시리아 등 22개국이 포함된 이른바 ‘범죄 용의자’ 그룹으로, 사실상 미국산 AI 칩을 수입할 수 없다.
규제 완화 소식이 발표된 이후, 미국 기술 기업들은 중동 지역에서 대형 계약을 줄줄이 따냈다. 지난달 13일 엔비디아는 사우디 국부펀드가 소유한 AI 기업 휴메인이 추진하는 100억 달러(약 13조6,000억원) 규모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 자사 최신 고성능 AI 칩인 ‘GB300’을 1만8,000장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시작으로 엔비디아는 향후 5년 동안 수십만 장의 AI 칩을 사우디에 공급할 예정이다. 엔비디아의 경쟁사인 AMD도 동일 프로젝트에 AI 칩과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 대표 네트워크·보안 기업인 시스코는 휴메인의 안전하고 효율적인 AI 인프라 구축을 위해 보안 기술을 공급한다.

투자 열기 지속 가능성 '의문'
미국 기업들이 중동의 'AI 투자 붐'에 올라타 막대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수혜 기업들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나온다.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이 대대적인 AI 투자에 나서고 있지만, 과거 해당 지역에서 사업을 예고 없이 축소하거나 폐기한 경우가 많았다고 보도했다. 중동 국가들의 AI 투자가 지속 가능한 수익원이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평가다.
실제 중동에서는 큰 관심을 끌었던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가 돌연 무산되거나 변경된 전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7년 시작된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형 도시 조성 사업 '네옴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다. 네옴 프로젝트는 사우디 북서부 홍해 연안, 요르단과 이집트 국경 인근에 서울의 44배에 달하는 땅을 개발해 스마트 도시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사업은 크게 더 라인(직선형 수직 도시)과 옥사곤(팔각형 구조 최첨단 산업도시), 트로제나(친환경 산악 관광단지) 등 3개 프로젝트로 나뉘며, 총사업비는 1조 달러(약 1,360조원)에 달한다.
문제는 네옴 프로젝트의 사업 추진 동력이 올해 들어 눈에 띄게 약화했다는 점이다. 2029년 아시안 동계게임, 2030년 리야드 엑스포, 2034년 월드컵 등 대형 국제 행사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예산이 우선적으로 투입된 결과다. 네옴 프로젝트가 사실상 '후순위'로 밀려난 셈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산하 투자 전문 매체 fDi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는 올해 네옴 프로젝트 등 일부 사업에 투입되는 예산을 최대 60%까지 줄였다. 지난해 12월에는 네옴 프로젝트 관련 5조원 규모 계약이 무산되기도 했다.
이에 더해 WSJ은 중동 지역이 항상 지정학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최근 벌어진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교전이 이 같은 위험성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만약 이란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심화하거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중동 지역의 AI 인프라 투자 열기는 한풀 꺾일 가능성이 크다. 분쟁이 장기화할 경우 중동 국가 정부들의 정치 및 경제적 우선순위가 조정되며 미국 기술 기업들의 수익원이 한순간에 증발할 위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