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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최종 판결, 번복 가능성 희박
中 기업 기술 침해 사례 누적
양자 분쟁에서 글로벌 차원 제재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가 중국 최대 패널 생산 업체 징둥팡(BOE)의 삼성디스플레이 영업비밀 무단 취득 혐의를 인정하며 14년 8개월간 미국 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수입을 금지하는 제재를 예고했다. 이로써 프리미엄 전자제품 핵심 부품 시장 내 BOE의 경쟁력은 크게 약화하고, 장기간 왜곡됐던 업계 경쟁 구도 역시 상당 부분 교정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직접 제재에 나서면서 중국의 기술 탈취가 글로벌 차원의 강력한 제재 대상이 되는 선례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형선고’ 준하는 중징계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최근 BOE에 14년 8개월간 미국 시장에 OLED 패널 수입을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ITC는 지난달 11일 예비판결에서 “삼성디스플레이의 보안 조치가 탁월한 수준이었음에도 BOE가 삼성디스플레이 영업비밀을 부정한 수단으로 취득해 사용했다”며 15년 5개월 수입 금지 조치를 예고했지만, 이후 판결에서 기간을 일부 조정했다.
다만 미 당국의 판결이 확정된 것은 아니며, 최종 판결은 오는 11월로 예정돼 있다. 그럼에도 금융투자업계와 디스플레이업계 등은 이번 결과가 크게 달라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예비판결이 BOE의 삼성디스플레이 영업기밀 부정 취득을 대부분 인정한 데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가 중국에 대한 견제를 늦추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 같은 이유로 BOE의 글로벌 사업 전략에도 직격타가 예상된다. 미국은 세계 최대 프리미엄 전자제품 소비 시장인 동시에 글로벌 IT 제조사들의 핵심 판매 무대다. 특히 BOE는 미국 애플의 아이폰용 OLED 공급사 중 하나로,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에 이어 3위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노트북 등 고부가가치 제품군에서 OLED 패널은 핵심 부품으로, BOE는 주력 사업 부문 경쟁력에 타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경쟁사 품질 신뢰도 위협하며 시장 왜곡 심화
이번 ITC의 결정은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가 겪어 온 피해 복구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15년에 가까운 장기 제재는 일반적인 스마트폰 및 IT 기기의 제품 교체 주기를 여러 차례 넘어서는 수준인 만큼 이에 따른 손실을 만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쟁사 입장에서는 왜곡됐던 경쟁 구도가 교정되고, 합법적 기술 보유에 기반한 정당한 보상이 이뤄질 여지 또한 넓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를 사실상 ‘사형선고’에 준하는 중징계로 보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에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급격한 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기술 침해 논란이 자리한다. 그간 업계에서는 중국 업체들이 경쟁사의 핵심 공정과 설계, 제조 레시피, 시험 데이터 등 민감한 정보들을 무단 수집한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경쟁사들은 프리미엄 패널 시장 내 점유율 하락과 수익성 악화를 호소해 왔다. 여기에 중국 업체들이 주도하는 단가 경쟁까지 심화하면서 고사양 패널에서조차 기술 프리미엄을 온전히 반영하기 어려운 국면이 장기화됐다.
결국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2022년 12월 BOE를 특허 침해 혐의로 ITC에 제소했고, 이듬해 10월에는 BOE 및 자회사를 상대로 영업 비밀 침해 소송도 제기했다. BOE가 자사와 협력사 전현직 임직원을 통해 특허 기술을 탈취하고,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BOE는 일관적으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지난 3월 ITC는 특허 침해 관련 판결에서 삼성디스플레이의 손을 들어줬다. 여기에 이번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15년에 가까운 수입 금지 조치까지 내려지면서 시장 왜곡을 바로잡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게 업계 전반의 평가다.

기술 보안·특허 보호 중요성 재부각
나아가 이번 제재는 기술 탈취 대응의 무대가 양자 분쟁에서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됐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중국 기업의 기술 침해는 상대국과의 민형사 소송이나 일부 국제 중재로 한정되는 경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미국 ITC가 직접 제재에 나선 것은 기술 침해가 피해 당사자인 한국 기업은 물론 국제 무역 질서와 지식재산권 보호 체계 전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로써 중국 기업이 해외 기술을 무단 활용할 경우, 피해국뿐 아니라 제삼국의 강도 높은 제재에 직면할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이는 다시 핵심 인재 및 기술 유출 억제 효과로 이어질 전망이다. 과거에는 특정 국가 또는 기업의 핵심 연구인력이 중국 경쟁사로 이직해 기밀을 넘기더라도 일정 수준의 배상 후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 탈취가 발각되면, 문제가 된 기업의 시장 접근권이 전면 차단되는 위험이 현실화됐다. 이는 기술 유출에 연루된 인력 채용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종국엔 불법 취득 기술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를 낳을 것이란 분석이다.
국제 공급망 차원에서도 이번 사안은 기술 보안과 특허 보호의 중요성을 재부각시킨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여타 첨단 산업에서도 지식재산권 분쟁이 빈번한 만큼 글로벌 차원의 공조와 제재 메커니즘이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다. 주요국 정부와 국제기구가 공조해 제재 집행력을 담보하고, 기술 탈취의 경제적 유인을 대폭 축소하는 구조다. 이에 기술 탈취가 단순 상거래 분쟁을 넘어 안보·산업 경쟁력 전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인식 또한 국제사회에서 단단히 자리 잡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