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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별 차등 규제 악용 우려
다수 국가 경제적 예속 가능성
반복적 금융 사고, 안정성 위협

스테이블코인이 각국의 외환 거래 규정을 무력화하는 등 금융 시스템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란 경고의 메시지가 나왔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시장 점유율이 압도적인 만큼 여타 통화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은 경쟁력이 제한되고, 종국엔 각국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저해할 것이란 지적이다. 이 같은 경제안보 문제가 해킹 등 기술적 리스크와 맞물리면서 금융 질서 전반의 불안정을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거세지는 모습이다.
거래 제한 등에도 우회 경로 존재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경제보좌관 겸 통화정책국장은 21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학자대회’에 참석해 “달러가 아닌 원화 등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은 자본 유출의 통로를 넓힐 수 있다”며 “기존 외환거래 규정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놨다. 이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제기된 ‘미국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공세에 맞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해 통화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발언이다.
신 국장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독주 체제에선 여타 통화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의 순기능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BIS에 따르면 테더(USDT)와 써클(USDC) 등 달러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98.9%에 이른다. 각국에서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더라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이어질 것이란 게 신 국장의 관측이다. 그는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을 통해 달러 표시 암호화폐와 맞교환함으로써 자본 유출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신 국장은 스테이블코인의 범죄 연루 비율이 이미 비트코인을 추월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특성 때문에 금융 범죄와 자본유출 통제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된다”고 짚으며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한 범죄 행위는 2022년 비트코인을 추월했고, 현재 암호화폐를 활용한 범죄 행위의 63%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시장의 평가 또한 신 국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나라별 규제가 천차만별인 만큼 이를 악용하기 쉬운 구조라는 지적이다. 특정 국가에서 발행이나 거래를 제한해도 해외 거래소를 통한 우회 경로는 여전히 열려 있는 식이다. 아울러 탈중앙화 금융(DeFi) 생태계에서는 개인 지갑만으로도 거래가 가능해 당국의 개입 여지가 사실상 사라진다. 이와 같은 구조에선 기업 또는 고액 자산가가 자국 법망을 피해 해외로 자금을 이전하는 게 용이해진다. 이는 곧 국가 금융안정성에 심각한 취약점으로 작용한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주된 시각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 지위 공고해져
시장 내 전문가들 역시 스테이블코인이 불러올 통화주권의 불균형 확대를 우려하는 모양새다. 앞서 언급했듯 스테이블코인의 상당수는 달러와 연동되기 때문에 거래 규모가 확대될수록 국제 금융질서 속 달러의 영향력도 함께 커진다. 이는 기존 국제통화 체계에서 이미 우위를 점한 달러가 디지털 환경에서도 기축통화 지위를 강화하는 효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결국 달러에 기반하지 않은 스테이블코인은 그 자체로 경쟁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어 통화주권의 불균형 또한 심화할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스테이블코인이 초래할 주된 리스크로 ‘통화 대체 현상’을 꼽았다. 만약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각국의 지급결제 수단으로 널리 쓰이게 되면 해당국의 통화 수요는 감소하게 되고, 통화 주권 침해와 정책 효율성 저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유로, 위안, 엔, 스위스프랑 등을 기반으로 하는 스테이블코인 발행 논의가 활발해진 배경이기도 하다.
이들 화폐는 글로벌 거래 비중과 금융시장 영향력이 일정 수준 확보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각국이 자국 화폐를 기초로 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면, 달러 독점 구도를 부분적으로 완화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 역시 민간이 발행한 가상자산이 사실상 법정화폐의 지위를 갖는 셈이어서 통화정책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되면, 기존 은행 중심의 신용중개 기능은 축소될 공산이 높다.
여타 국가는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경제 규모가 작거나 국제 금융에서 영향력이 낮은 국가들의 경우, 자국 화폐를 기초로 한 스테이블코인 발행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이들 국가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사용을 사실상 강제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금융거래의 상당 부분이 달러 연동 디지털 자산을 통해 이뤄지게 되면, 해당 국가는 통화정책 수단을 잃고 경제 주권을 스스로 내어주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는 곧 해당 국가의 경제적 예속을 의미한다.

보안 사고 발생 시 금융시장 연쇄적 혼란 불가피
스테이블코인이 초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위험은 디지털화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보안 취약성이다. 디지털 자산은 기본적으로 네트워크 기반에서 발행·유통되기 때문에, 해킹이나 사이버 공격의 직접적인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2월 스테이블코인 결제 플랫폼 인피니(Infini)에서는 온체인 메시지를 통한 해킹 공격이 발생해 5,000만 달러(약 730억원) 규모의 피해가 발생한 바 있으며, 6월에는 리서플라이(Resupply)가 950만 달러(약 133억원) 상당의 해킹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될 경우, 단순한 투자자 손실을 넘어 금융 시장 전반의 안정성을 흔드는 위기로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 가상자산은 투기성 자산으로 분류돼 피해가 발생해도 경제 전반으로 전이되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 가치와 1대 1로 연동되는 구조를 가진다. 이 때문에 시스템에 치명적인 해킹이 발생하면, 연동된 통화의 신뢰도에 흠집이 생긴다. 이는 곧 금융시장의 연쇄적 혼란을 의미하며, 실물경제에 그 충격을 전파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의 제도권 편입을 둘러싼 논의가 기술적 편의성 측면에 국한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킹, 시스템 취약성 등 기술적 리스크가 통화주권 약화와 같은 각국의 경제안보 문제와 만나 금융 질서 전반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단 우려에서다. 스테이블코인이 새로운 화폐 혁신으로 기대받는 가운데, 각국이 통제하기 힘든 위험이 상존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대비책과 국제 공조 체계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