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노동 동일임금 법제화, 60년 호봉제 사라지고 직무급제 확산 전망
입력
수정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근로기준법에 명시 방안 추진 사회적 합의 없는 입법은 혼란

정부가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제도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한 본격 행보에 나섰다. 임금 데이터 수집 체계화와 조사 방식 혁신을 위한 연구 용역을 잇따라 발주하며 법제화 밑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동시에 내년도 예산안에서 임금체계 개편 관련 지원도 대폭 확대한다. 다만 호봉제에 의존하는 현재 임금체계를 직무급제로 바꿔야 하는 만큼 적지 않은 시행착오가 동반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동일노동 동일임금 법제화 속도
1일 산업계와 학계 등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18일 △‘오픈데이터 임금 포럼’(사업비 6,000만원) △‘임금데이터 혁신 포럼’(사업비 4,000만원) 등 두 건의 연구용역 공고를 내고 전문가 논의체 구성을 추진 중이다. 오픈데이터 임금 포럼은 흩어진 임금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로 체계화하고 표준 서식을 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포럼은 현행 임금 정보 실태조사의 조사 항목을 재검토하고 다양한 임금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정책적 제언을 도출하는 자리로 운용될 예정이다.
정부는 포럼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도엔 이전보다 두 배 수준의 대규모 임금 실태조사에 나선다. 관련 예산을 올해 25억원에서 54억원으로 두 배 이상 늘리고, 조사 표본도 3만3,000개에서 6만6,000개로 확대한다. 이는 정부가 추진 중인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과 관련한 데이터를 축적해 향후 법·제도 개편의 근거 자료로 삼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연구 성과와 실태 조사를 토대로 '임금정보 수집'과 수집된 정보의 제공 방식을 혁신하고 향후 법제화의 기초자료로 삼을 방침이다. 특히 업종·직무별 임금 수준과 격차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해, 기업과 근로자가 활용할 수 있는 ‘임금지도’를 그리고 객관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기업 내부에서 직무·직군별 임금 수준을 분포 형태로 공개·집계하는 '임금분포제'도 도입해 국가 통계로 활용한다. 예컨대 대기업 사무직 5년차, 생산직 10년차의 평균임금과 상·하위 25% 분포를 수치화하고 이를 공개하는 식이다. 국가통계로 제도화하면 공식적 기준이 생기게 되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임금 구조가 투명해져서 노동시장 내 비교 압력이 커지는 효과가 있다. 정부는 이를 통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판단 '매뉴얼'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정부는 연내 근로기준법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명시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이는 '차별과 배제 없는 일터' 조성이라는 국정 과제의 일환으로,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동일한 사업내에서 동일노동 원칙이 지켜지도록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동일노동에 대하여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을 근로기준법에 신설하는 것이 골자다. 당초 고용부의 국정기획위원회 업무보고에서는 내년 '사회적 대화'를 추진하고 2027년 근로기준법 개정안 마련하고 입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대통령실 업무보고에서는 올해 안에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고 내년 하반기 시행으로 일정이 앞당겨졌다.

대법원도 인정한 원칙,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은 위법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입법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남녀 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제8조 제1항에서 “사업주는 동일한 사업 내 동일가치노동에 대해서는 동일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용에 있어 남녀 간의 평등한 기회 및 대우를 보장’하려는 남녀고용평등법 목적상 이는 남녀 근로자 간의 임금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규정이다.
이에 그간 노동계는 남녀 간 성차별을 넘어 무기계약직과 정규직, 공무직과 공무원 등 일반 차별 사건에 남녀고용평등법 제8조를 확대 적용하려고 시도해 왔다. 대학 시간강사를 전업과 비전업으로 구분해 시간당 강의료를 차등 지급한 사안에서 남녀 간 임금 차등이 아님에도 남녀고용평등법 제8조를 적용한 대법원(2019. 3. 14. 선고 2015두46321)판결을 인용하며 남녀고용평등법 제8조가 근로 관계의 일반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남녀고용평등법 제8조는 성별 간 임금 차별을 규율하기 위한 규정으로 해석되며, 남녀고용평등법 제8조 제1항 위반은 형사처벌 대상이 되므로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엄격하게 해석하고 이를 확장 해석하거나 유추 해석할 수 없다”는 판례가 계속되고 있다. 이에 정부가 아예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근로기준법에 규정해 일반 원칙화하겠다는 것이다.
호봉제 흔들, 직무급제 도입 논의에 노동계 긴장
문제는 우리나라는 아직 대다수 기업과 기관이 호봉제 같은 연공급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차가 쌓이면 자동으로 임금이 높아지는 구조로, 직무 가치에 기반한 임금 체계는 아니다. 특히 연공급제는 ‘노동조합이 있는 대기업에 다니는 정규직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있어 그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심화하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 또 연공급제는 사용자의 인건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어 결국 중고령자의 고용 유지에도 불리하고 신입 채용을 꺼리게 돼 청년 세대에도 불공정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 대안으로 직무급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많았으나, 노동계 등의 반대로 논의가 공전됐을 뿐 실제 직무급제가 확산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직무급제는 업무의 책임과 난이도 등에 따라 임금을 산정하는 제도로, 직무급제 도입을 위해서는 실태조사 등을 거쳐 직무와 직위, 근속 등에 따른 객관적인 임금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직무 내용이 비슷해 보여도 숙련도 등에 차이가 있어 근로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을 확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노동계는 직무급제가 본격적인 성과평가제 도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반발한다. 호봉제에 따른 급여 인상이 인정되지 않아 전체 임금 수준이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여기에 근로자들이 여전히 호봉제를 선호한다는 점도 넘어야 할 과제다. 법제화가 현실화되면 현재 허용되는 차등 처우가 금지된다. 누군가는 급여가 오르고 다른 누군가는 줄어들 수 있다는 의미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이는 향후 임금과 기업 재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