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폭염에 웃은 中 가전그룹, 삼성·LG ‘샌드위치 위기’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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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적 폭염 틈타 시장 침투력 높여
고급화 전략으로 대응 나선 韓 기업
TV 시장 일본 존재감도 뚜렷, 경쟁 격화

유럽 전역을 강타한 폭염이 중국 가전업체 마이디어 그룹(Midea Group)의 기회를 키웠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마이디어 에어컨 판매가 급증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전통적 입지를 위협한 것이다. 이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빌트인 주방가전과 초대형 TV를 중심으로 한 프리미엄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지만, 그에 따른 성과는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설치 간소화·저가 전략으로 시장 점유율 확대
24일(현지시각) 글로벌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레이팅스에 따르면 독일은 이탈리아에 이어 마이디어의 두 번째로 큰 유럽 시장이 됐다. 마이디어는 지난 한 해 유럽 1위 시장인 이탈리아에서 16만 대의 에어컨을 판매했고, 독일에서도 4만4,000대를 판매하며 강세를 보였다. 마누엘 지탈러 독일 마이디어 전략책임자는 “온화한 기후와 높은 비용 등으로 에어컨 설치에 익숙하지 않았던 독일에서 마이디어 에어컨이 2년 연속 히트를 쳤다”며 자사 제품에 대한 수요 확대를 강조했다. 과거엔 기후 특성상 에어컨 수요가 낮았던 지역이지만, 기록적 폭염을 겪으면서 에어컨 보급률 또한 높아졌단 설명이다.
이 같은 유럽 시장 내 중국산 에어컨의 분전은 올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상반기 기준 마이디어의 유럽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35% 늘었고, 프랑스에서는 68%나 급증했다. 같은 기간 중국의 전체 에어컨 수출 물량이 오히려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향 물량만 두 자릿수 증가세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유럽 시장은 중국 업체들에 사실상 내수 부진을 상쇄하는 돌파구가 됐다. 특히 간소화된 생활상을 지향하는 유럽에서 이동식·벽걸이형 에어컨은 주류로 주목받으면서 복잡한 설치가 필요 없는 제품군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기업들의 수혜로 이어졌다.
유럽의 건축 규제와 임대주택 비중도 중국 업체들의 성장세를 뒷받침했다. 외벽에 구멍을 뚫어 실외기를 설치해야 하는 분리형 에어컨은 설치 허가와 비용 문제 등으로 진입 장벽이 높았지만, 중국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즉시 설치 가능한 제품으로 접근성을 높였다. 독일 마이디어 연구개발팀이 현지 특성에 맞춰 내놓은 ‘포타스플릿’ 제품이 대표적 예로, 사용자가 직접 설치할 수 있는 구조의 해당 모델은 독일 시장에서 열띤 반응을 이끌었다. 이러한 맞춤형 전략과 가격 경쟁력은 유럽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했고, 중국 브랜드의 존재감 확대로 이어졌다.
이 같은 흐름은 유럽 가전 시장의 기존 판도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냉난방공조(HVAC) 사업을 중심으로 유럽 시장을 확대해 온 상황에서 마이디어와 하이센스 같은 중국 기업들이 저가·보급형 제품을 무기로 빠르게 점유율을 잠식한 것이다. 특히 냉·난방 기능을 겸비한 고효율 히트펌프 수요가 경기 둔화와 높은 비용 부담으로 위축되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산 에어컨은 그 자릴 빠르게 꿰찼다. 이처럼 ‘에어컨 불모지’로 불리던 유럽에서조차 중국산 제품이 대세로 자리 잡는 상황은 한국 업체들에 새로운 경쟁 부담을 안기는 신호탄이 됐다.
삼성·LG, 프리미엄 전략으로 점유율 확대 모색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프리미엄 전략을 둘러싼 회의론이 짙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격 경쟁 대신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겠다는 게 이들 기업의 의도지만, 시장의 반응은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글로벌마켓인사이트(GMI)에 의하면 전 세계 프리미엄 빌트인 주방가전 시장은 2023년 179억 달러(약 26조원)에서 2032년 274억 달러(약 39조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를 기회로 보고 각각 ‘데이코’와 ‘SKS’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프리미엄 시장에 공을 들여 왔다.
삼성전자는 럭셔리 빌트인 라인업을 강조했다. 데이코 냉장·냉동고는 내부 전면을 최고급 메탈 소재로 제작해 차별화했고, 인덕션 프로레인지에는 내구성이 강화된 안티 스크래치 글라스를 적용했다. LG전자도 맞춤형 히든 인덕션, 프리미엄 오븐 등으로 ‘주방 전체를 솔루션화하는 경험’을 제시하며 차별화 전략을 펼쳤다. 두 회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밀라노 가전 박람회 등 글로벌 무대에서 고급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프리미엄 전략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보쉬, 지멘스, 밀레 같은 현지 강자들이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시장을 장악한 탓이다. 단순히 ‘럭셔리’와 ‘디자인’만 내세운 접근은 경쟁사와의 차별성이 떨어진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그러는 사이에도 일정 수준의 성능을 보장하는 중국 저가 브랜드의 공세는 점점 거세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프리미엄 전략이 기업의 비용 부담만 늘리고, 시장 점유율 방어에는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전통 강자 일본 귀환에 ‘샌드위치 위기’
여기에 최근에는 일본 기업들까지 프리미엄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면서 한층 고난도의 경쟁이 펼쳐지는 형국이다. 과거 세계 TV 시장을 장악했다가 액정표시장치(LCD) 전환기에 밀려났던 소니와 파나소닉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대에 부활하며 한국 업체들과의 정면 승부를 예고한 것이다. 소니는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열린 TV 비교 평가 행사 ‘2025 TV Shootout’에서 ‘브라비아 8 II’로 3년 연속 ‘King of TV’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파나소닉 ‘Z95B’는 HDR 화질과 테크닉스 음향 튜닝으로 주목받으며 종합 3위에 올랐다.
삼성전자의 S95F와 LG전자의 G5는 각각 2위와 4위에 그쳤다. 이들 두 회사는 지난 10여 년간 OLED TV에서 ‘밝기’를 핵심 경쟁력으로 내세워 왔다. 거실이나 매장처럼 밝은 공간에서도 선명한 화면을 구현해 소비자 체감 화질을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최근 MiniLED TV가 수천 개의 백라이트와 로컬 디밍 기술을 활용해 최대 5,000니트에 달하는 초고휘도를 구현하면서 ‘밝기 경쟁’의 주도권은 사실상 MiniLED 진영으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OLED TV의 경쟁력 또한 정밀 화질, 색 정확성, 사운드 품질 등 일본 업체들이 전통적으로 강점을 지닌 영역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중국 업체들 역시 TV를 비롯한 디스플레이 부문에서는 고급화 전략을 취했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조사에서 지난해 4분기 글로벌 프리미엄 TV 시장 내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29%로 1위를 차지했고, 중국 TCL(20%)과 하이센스(12%)가 나란히 2위와 3위를 기록하며 삼성전자를 추격했다. 또 다른 시장조사기관 옴디아는 중국 내 OLED 채택률이 지난해 47%에서 올해 78%로 급등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는데, 이는 중국의 OLED 생산이 본격화할 경우 한국 기업의 입지가 추가로 흔들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한국 가전 기업들은 일본의 기술 공세와 중국의 저가·프리미엄 협공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단순히 밝기나 디자인을 강조하는 기존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인공지능(AI) 기능 강화, 서비스·콘텐츠 연계, 중저가 프리미엄 라인업 확대 등 다변화된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샌드위치 위기’에 내몰린 한국 가전 산업의 장기적 경쟁력에도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전반의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