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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가을 이사 철을 맞이한 가운데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각지에서 전세대란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5월 감소세에 접어든 서울 지역 아파트 전세 물건은 꾸준히 3만 건대의 낮은 수준을 기록 중이며, 전셋값은 급등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강남권을 중심으로는 올해 초와 비교해 50%가량 전셋값이 폭등한 물건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10일 부동산 데이터업체 아실에 따르면 전날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3만997건으로 집계됐다. 올해 3월까지만 해도 4만 건을 웃돌던 서울 전세 매물은 지난 5월 3만 건대로 내려온 후 꾸준히 3만 건대 초반을 기록 중이다. 심지어 이달 1일에는 2만9,831을 기록하며 2만 건대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낮아진 대출 문턱, 아파트 전세 수요 부추겨
아파트 전세 매물이 급감한 이유로는 올해 초 시장에 쏟아졌던 급전세 매물들이 빠르게 소진됐다는 점과 대폭 줄어든 대출금리 부담이 꼽힌다. 지난해 최고 6%대까지 치솟으며 임차인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던 시중은행의 전세자금대출 금리는 최근 4%대 이하로 떨어졌다. 이에 월세를 찾던 임차인들도 줄어든 이자 부담에 적극적으로 전세 매물을 찾기 시작했다. 또 서울 강서, 인천 등 일명 ‘빌라왕’으로 불리던 이들의 대규모 전세사기 논란 이후 연립·다세대, 다가구 등 비아파트의 전세 물건 기피현상이 심화했다. 이는 역전세난을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올해 초 아파트 임대 시장과는 정반대의 분위기다.
임차인들의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자 전셋값도 급등하고 있다. 부동산 리서치업체 부동산R114의 올해 3분기(7∼9월) 서울 아파트 전세가 조사에서 평균가는 5억1,598만원으로 동일 단지·주택형 신규 계약 기준 올해 상반기(4억8,352만원)와 비교해 6.7% 올랐다. 서울 일부 단지에서는 올해 초와 비교해 50% 가까이 뛴 곳도 나왔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잠실동 소재 잠실엘스(전용면적 84㎡)는 지난 9월 27일 12억원에 세입자를 들였다. 동일 면적대가 지난 1월 8억3,000만원가량에 거래된 것을 감안하면 4억원 가까이 오른 셈이다.
시장에서는 전세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는 가운데 2024년 예정된 아파트 입주 물량이 큰 폭으로 감소하며 전세대란에 대한 우려를 키웠다. 내년 서울에 공급되는 아파트 입주 물량은 8,000여 가구로 올해 3만3,000여 가구의 25% 수준에 그친다. 여기에 최근 정부가 신혼부부 대상 전세자금 대출 소득요건을 기존보다 1,500만원 상향하는 등 요건은 낮추고 금리(2.1~2.9%)는 낮추는 등 대출 부담을 줄였다는 점도 임차인들의 전세 수요 심리를 부추기고 있다.
연휴 직후 맞이한 가을 이사철, 전세가 '꿈틀' 예상
시장에서는 최근의 부동산 가격 회복세와 가을 이사 철이 맞물려 전셋값 상승세가 본격 심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이달 전국 아파트 입주물량은 총 57개 단지, 4만1,724가구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수도권은 2만3,265가구로 전체 입주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김지연 부동산R114 책임연구원은 “이달 대규모 입주물량이 전국에서 쏟아지고 있는데, 가을 이사철을 맞아 전세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전반적인 가격 상승 흐름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임대차 시장에 찾아온 모처럼의 활기는 가을 이사철 쏟아진 매물을 소화하지 못해 역전세난 우려를 키웠던 지난해 하반기와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에는 적지 않은 세입자가 오를 대로 오른 대출금리에 부담을 느끼며 전세 대신 월세를 찾았고, 그 결과 지난해 10월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직전월과 비교해 20% 넘게 늘었다. 하락 폭을 키우던 전셋값 역시 3년 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올해 추석 연휴 직전 ‘국민 주거 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경기 남양주, 하남, 고양, 광명과 인천 등에 추진 중인 3기 신도시 용적률을 높여 공급량을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해당 대책에서는 단기적 공급 확대 방안으로 오피스텔, 연립, 다세대 등 비아파트 공급 확대를 제시했다.
하지만 현재 인허가 완료 물량 중 착공이 연기돼 분양 일정을 잡지 못한 단지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등 공급 가뭄 장기화에 대한 우려를 종식하는 데는 역부족인 모양새다. 공급 가뭄이 임대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업계에서는 수분양자들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었다.
"인위적 경기 부양 안 된다"는 정부, 전문가들은 '갸웃'
정부는 인위적으로 부동산 경기를 부양할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26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주택공급 활성화 대책 발표 자리에서 “이번 공급 대책의 목표는 경기 부양이나 이를 통해 수요자들이 추가적인 혜택을 노리고 다시 시장에 진입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부동산 가격을 직접 자극하거나 수요를 진작할 수 있는 정책은 아예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원 장관의 발언에 대해 “인위적인 경기 부양이 아니라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가계대출이 폭증하는 등 임계점에 다다른 상황에서 대출 문턱을 추가로 낮추고 비아파트에 대한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수요 진작이 아니라면 무엇이냐”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지난 7월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국내 예금은행의 가계대출(정책모기지론 포함) 잔액은 6월 말 기준 1,062조3,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같은 가계대출 급증의 배경에는 전세대출을 포함한 주택담보대출의 폭증이 결정적 원인으로 꼽힌다. 올해 6월 주담대는 전월 대비 7조원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2020년 2월(7조8,000억원) 이후 3년 4개월 만의 최대 폭 증가다. 적극적인 정책대출을 통해 부동산 공급 활성화를 기대한다는 정부의 청사진이 ‘시장과 시장 참여자들 모두를 위한 부양책’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보다 ‘당장의 경기 부양을 위해 시한폭탄을 뒤로 미룬 셈’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듣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