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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내년도 정부 예산안' 본격 심사, 쟁점은 대폭 삭감된 R&D 예산 과기계 "시급성 우선으로 필요한 부분만 복원", 정부에 관점 변화 주문 중복투자 및 좀비기업 만연, 이런 풍토 조성한 연구비 집행 방식 바꿔야
대폭 삭감된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두고 여야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여당은 나눠 먹기와 중복 등 비효율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예산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반면, 야당은 졸속으로 만들어진 예산안에 동조할 수 없다며 전면 백지화를 주장하고 있다. 과학기술계에서도 예산 삭감이 연구 환경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과기계에 만연한 관행의 근본 원인이 정부 제도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당 "모든 성과 허사로 만들 수도", 여당 “일부 예산 증액 가능성 있다”
국회가 이번 주부터 656조9,000억원 규모의 내년도 정부 예산안 심사에 돌입한다. 12일 국회에 따르면 지난주 종합정책질의를 마친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이번 주부터 소위원회 심사를 진행한다. 14~17일엔 감액 심사, 20~24일엔 증액 심사에 나선다. 이후 30일 예결특위 전체회의에서 예산안을 의결하는 게 목표다. 이번 심사의 최대 쟁점은 정부가 국가 건전재정 확보를 이유로 대폭 삭감한 R&D 예산이다.
정부가 제시한 내년도 R&D 예산안은 25조9,152억원으로 전년 대비 16.6% 삭감된 수준이다. 당초 올해 6월 마련된 예산안은 2023년도 24조9,392억원에서 2% 증가한 25조4,351억원으로 편성됐으나, 지난 8월 최종예산안에서는 대폭 삭감된 바 있다. 지난 6월 28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 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따른 것이다.
정부 R&D 예산안을 보면 기초연구(-6.2%), 정부출연연구기관(-10.8%) 관련 예산이 크게 줄었고, 4대 과기원 주요사업비도 약 12% 삭감됐다. 노벨과학상급 기초연구 성과를 키우겠다는 목표로 2011년 설립된 IBS 주요사업비 역시 올해 2,104억8,600만원에서 내년 1,826억원으로 줄어들었다.
이에 야당은 정부가 비효율성 제거를 명분으로 명확한 기준도 없이 삭감 결정을 내렸다며 강력한 제동을 걸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R&D 사업을 제로(0) 베이스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지 단 4일 만에 비효율적인 부분을 골라내 5조원이 넘는 예산을 잘라낸다는 것 자체가 졸속이라는 주장이다. 또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원들이 연구 현장을 떠나고 해외로 가거나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앞서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2024년 예산안 분석 보고서'에서도 현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 없는 삭감은 이제까지의 연구 성과를 허사로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반면 여당은 건전 재정에 기반한 정부안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본다. 다만 과학기술계와 학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일부 R&D 예산의 경우 증액 가능성을 시사했다. 특히 기초 원천 기술연구와 인재양성 관련 부분 등에 대해서는 증액을 추진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상황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갖춰지면'이라는 전제를 걸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이번에는 구조조정 원칙을 고수하고, 2025년 예산안부터 복원폭이 넓혀 나가겠다는 입장으로 해석했다.
과기계, 이번 심의에 마지막 희망 걸었다
전례 없던 규모의 R&D 예산 삭감에 연구 현장은 현재까지도 거센 반발과 함께 당장 내년부터 불어닥칠 혼란을 우려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와 학계는 이번 국회 예산안 심의 절차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이들은 정부 R&D 예산만큼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국가 대계 차원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전면 복구가 당연하지만, 굳이 손을 대야 한다면 시급성을 우선으로 필요한 부분만 복원하는 선택과 집중 방식의 관점 변화도 주문했다.
현재 과기계는 국가 미래 성장 단초인 기초연구에 대한 안정적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당초 R&D 예산 삭감 전에는 내년부터 NST 산하 각 출연연이 차세대 미래 연구를 위해 총 1,168억원 규모의 신규 과제 50개를 추진할 예정이었다. △가속팽창하는 우주 원리에 관한 연구(한국천문연구원·11억4,000억원) △미래 모빌리티를 위한 EARTH 기술개발(한국건설기술연구원·20억원) △과학기술정보 서비스를 위한 거대 초지능 기술연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14억원) 등 의미가 큰 것이었는데 예산 삭감으로 추진이 불투명해졌다.
정부 R&D 예산 삭감이 신진 연구자들의 연구 환경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과기계는 25개 과학기술 출연연에서만 1,200명이 넘는 신진 연구자가 감원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뿐 아니라 기존 연구자들의 인건비 삭감도 불가피하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해 출연연의 한 연구자는 “출연연의 R&D 예산을 깎는 건 사실 임금을 깎는 것과 같다”며 “우리를 불필요하고,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가면서 여기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박탈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사기업보다 처우가 좋지 않아도 국가출연연구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동기마저 뺏긴 상황에서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토로했다.
국내 연구 풍토 먼저 개선해야
하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동안 적지 않은 거품이 끼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5년간 국가 R&D 예산은 10조원 이상 급증했고, 연구비 배분 방식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100억원대 정부부처 과제를 200여 개 기업에 나눠준 사례도 있었는데,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R&D 지원이 아닌, 중소기업 보조금이라는 웃지못할 이야기까지 돌았다.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육성을 이유로 중소기업 예산 배정을 확대하면서 지역·성별·연령별로 연구비를 배분해 R&D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대북사업 관련 중소기업들이 R&D 과제를 중복으로 따낸 사례도 속출했다.
더 큰 문제는 매년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 연구 경쟁력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 세계가 인공지능(AI) 산업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경쟁하는 가운데, 우리나라 AI 비즈니스 역량은 그간 R&D 부문에서 축적해 온 경쟁력 대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데이터분석 업체 토터즈가 발표한 ‘글로벌 AI 인덱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6월 기준 전 세계 62개국 중 우리나라의 AI 경쟁력은 6위로 나타났다. AI 경쟁력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바꿔내는 비즈니스 역량 부문은 여전히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전반적 평가는 6위지만 ‘사업화(Commercial)’ 부문은 8.3점으로 18위를 기록, 평가 부문 중 가장 저조했다. 사업화 경쟁력은 전체 부문에서 7위를 기록한 이스라엘(40.5점)의 5분의 1 수준이며 8위와 9위를 기록한 독일(10.3점)과 스위스(13.3점)보다도 낮다.
이렇듯 연구비의 양적 증가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 낮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원인은 우리나라의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에서 찾을 수 있다. PBS는 연구자나 연구기관이 경쟁을 통해 과제를 수주해 인건비나 연구비를 충당하는 제도로, 1996년 연구 경쟁력을 키운다는 취지에서 도입됐으나, 프로젝트별로 예산이 집행되다 보니, 각 기관이 얼마나 많은 과제를 수주하느냐에 따라 예산 확보가 달라졌다. 이에 연구자들 사이에선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를 책임지기보단 자신의 연구 목적에 맞지 않는 과제라도 여러 개 수주해 적당히 기준에 맞는 성과만 내는 문화가 형성됐다. 국내에 만연한 연구비 나눠 먹기, 과제 쪼개기식의 예산 배분 관행 모두 PBS에서 비롯됐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연·지연등으로 점철된 특정 인맥의 연구자들이 연구 과제를 독식하거나, 상용화로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연구를 위한 연구'가 넘쳐나고 있다. 부처별, 분야별, 단계별 칸막이에 가로 막힌 탓에 중복 투자도 만연해 있으며, 국가 R&D로 명맥을 유지하는 이른바 좀비기업들도 여전히 판치고 있는 형국이다. 전 세계 유례가 없는, 무려 99%라는 R&D 과제 성공률에도 혁신 연구가 배출되지 못하는 것도 이같은 연구 풍토 때문이다. 정부는 연구자들에게만 화살을 돌리기 보다는 혁신성장을 위한 큰 그림 없이 단순히 예산을 배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잘못된 연구 풍토를 조성한 연구비 집행 방식부터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