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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급 회담 앞두고 견제성 발언 거래 성격 짙어진 무역 협상 ‘지불 능력’ 따라 갈리는 동맹국 지위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자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관세 협상을 언급하며 한국을 압박하는 무역 전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한국에 사실상 ‘일본처럼 양보하라’는 요구로 읽히며, 나아가서는 아시아 국가들을 동일한 기준 안에 묶어 자국 중심의 이익을 회수하려는 구조적 접근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압박 방식은 단순한 개별 국가 대응을 넘어 아시아 전체의 외교적 자율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는다.
‘관세 인하는 비용 지불의 대가’ 강조
24일(이하 현지시각)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CNBC, 블룸버그통신 등 다수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한국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과의) 무역 합의를 간절하게 원하는 상황”이라면서 “이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합의를 읽으면서 한국 측에서 나온 욕설(expletives)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경계하는 사이”라고 부연했다.
러트닉 장관의 이 같은 발언은 아시아 동맹국 간의 경쟁 구도를 유도해 추가적인 경제적·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앞서 미국은 일본에 부과한 상호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낮추고, 일본으로부터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받는 내용의 무역 협상을 이룬 바 있다. 이는 자동차에도 해당되는 사항으로, 기존 2.5% 관세에 25%의 품목별 관세를 더해 27.5%의 관세가 부과되던 일본산 자동차는 향후 미국향 수출에서 물량 제한 없이 15%의 관세만 물게 됐다.
미국 정부는 일본이 자국에 약속한 시장 개방과 인프라 투자 등 구체적인 내역을 상세히 밝히면서 관세 인하가 ‘비용을 지불한 대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또한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을 과시함으로써 여타 국가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양보를 요구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러트닉 장관은 “일본이 그러한 협의를 했다는 것을 한국이 확인했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상상할 수 있다”면서 “그들은 아마 ‘맙소사’라고 외쳤을 테고, 바로 오늘 내 사무실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러트닉 장관은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 한국 측 대표자들과 만나 약 1시간 20분간 합의를 진행했다. 미국 정부가 한국에 제시한 관세 부과 유예 시한은 8월 1일까지로, 협상 시한은 이제 단 1주일만을 남겨둔 상태다. 가뜩이나 일본이 먼저 미국과의 협상을 체결한 가운데 이처럼 시간적 제약이 엄중한 상황은 한국에 더 큰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란 게 외교계 전반의 평가다.
일본의 ‘상납 목록’ 속속 공개
트럼프 대통령 역시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도 돈을 내고 관세를 낮추는 것(buy it down)이 가능하다”면서 무역 협상을 일종의 거래로 보는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는 이날 워싱턴DC 연방준비제도(연준) 청사 공사 현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일본이 약속한 투자는 대출 같은 게 아니라 사이닝 보너스(signing bonus)”라며 “일본은 이를 후불로 낼 뿐”이라고 말했다. 사이닝 보너스는 계약 체결 시 선지급되는 일회성 인센티브로, 일본이 향후 수년에 걸쳐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는 일본과의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관세 인하를 원하는 다른 국가들에도 대가를 치를 것을 주문했다. 이는 일본이 제공한 실질적 대가의 명단 공개와 맞물리면서 미국 정부의 향후 무역 정책 압박 수위를 가늠할 단초로 해석된다. 백악관에 의하면 일본은 방위 지출 분야에서 미국 기업으로부터의 조달 규모를 기존 연간 140억 달러(약 19조원)에서 170억 달러(약 23조원)로 늘리기로 했다. 여기에는 일본이 미국 보잉사의 항공기 100대를 구매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또 일본은 미국산 쌀 수입량을 75% 늘리는 데 동의했다. 다만 해당 조항은 일본의 현행 세계무역기구(WTO) 저율관세할당물량(TRQ) 약 77만t(톤)을 유지하는 선에서 이뤄진다. 다시 말해 전체 쌀 수입량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가운데 미국산 쌀의 비중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아울러 일본은 농업과 다른 분야의 미국산 제품 80억 달러(약 11조원) 상당도 구매한다.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이 낸 5,500억 달러보다 훨씬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 외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 의원들을 초청한 행사에서 일본이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합작 사업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알래스카 LNG 개발 사업은 총 440억 달러(약 60조원)가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일본의 구체적인 투자 규모와 시점, 방식 등은 공개되지 않았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측에도 해당 사업의 참여를 요구한 바 있다.

조건부 혜택 전략 가동, 협상 조건 일방적 조정도
미국의 이러한 태도는 일관된 ‘조건부 혜택’ 전략으로 요약된다. 관세 인하라는 이익을 제시하되, 그에 상응하는 금전적·전략적 대가를 요구하며 상대국의 결정을 압박하는 식이다. 일본이 이를 수용한 이후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도 유사한 요구가 이어지는 것은 미국의 지역 전략 구도 안에서 설계된 순서라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다수의 아시아 국가가 개별적 주체로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설계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과의 협상에서 포착된 ‘5,500억 달러 상향 발표’는 이 같은 미국의 협상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미·일 2+2 무역 협상에 배석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 한 장을 공유했다. 사진 속 트럼프 대통령의 앞에는 ‘일본, 미국에 투자하다(Japan Invest America)’는 제목의 패널이 놓여 있고, 투자액으로는 ‘4,000억 달러’가 인쇄돼 있다. 하지만 인쇄된 ‘4’ 위에는 선이 그어졌고, 수기로 ‘5’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적혔다.
해당 패널은 일본 측이 사전에 준비한 물품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액을 임의 수정한 상황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미국은 최종 발표 단계에서 일본의 대미 투자 규모를 다시 5,500억 달러로 늘리는 등 자국의 이익을 매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를 넘어 협상 상대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미국식 강경 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이 지난 수십 년간 자국 시장에서 얻은 경제적 이익을 부각시키면서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전략적 보상을 내놓아야 할 시점이라는 메시지를 점점 더 분명히 하는 양상이다. 일본과 한국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아시아 전반을 동일한 기준과 틀로 관리하려는 전략적 접근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다시 동맹국에 대한 전략적 지위를 가치가 아닌 ‘지불 능력’으로 환산하려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아시아 국가 전반의 외교적 자율성과 협상 여지를 제약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