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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팁스 지원금 지급 미룬 정부 "20% 줄여서 드릴게요" 올해 예산은 오히려 증액, 일각에선 정책 일관성 부족 비판 고금리 속 자금난 겪는 벤처 업계, 정부 지원까지 줄면 어쩌나
민간 주도 기술창업 지원 사업인 팁스(TIPS)가 '정부 예산 삭감' 칼바람에 휘말렸다. 올해 팁스 지원 예산이 전년 대비 확대된 반면, 지난해 미지급된 팁스 R&D 지원금은 오히려 삭감되면서다. 투자 혹한기 속 혹독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대다수 스타트업은 급작스러운 정부 지원금 감액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미지급금 80%만 반영, 불응 시 '지급 불가'
팁스는 민간과 정부가 함께 우수한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다. 민간 팁스 운영사가 유망한 스타트업을 발굴해 선제적으로 투자하고, 중소벤처기업부가 R&D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팁스에 선정된 기업은 2년간 최대 5억원의 R&D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중기부는 지난해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일부 R&D 지원금을 정해진 일자에 지급하지 않았으며, 지급 시점을 올해까지 미뤘다.
문제는 정부가 올해 '대규모 R&D 예산 감액' 대상에 지난해 미지급된 지원금을 포함했다는 점이다. 올해 중소기업 R&D 투입 예산은 1조4,097억원으로, 지난해(1조8,247억원) 대비 22.7% 감소했다. 예산 규모가 대폭 조정되며 팁스가 속한 창업성장기술개발 사업 예산 역시 감액 절차를 밟았다. 올해 공고에 반영된 예산은 기존 필요분 대비 80%에 그친다. 협약 변경 대상 기업은 협약 금액에 비해 20% 삭감된 금액을 받게 되는 셈이다.
중기부가 업계에 배포한 R&D 협약 변경 매뉴얼에 따르면, 정부 지원 R&D 사업을 수행하는 기업들은 이번 감액에 대해 △수용 △(자발적)중단 신청 △불응 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해야 한다. 만약 기업이 협약 변경에 불응할 경우, 올해 연구비 전반을 지급받을 수 없게 된다. 사실상 대다수 기업이 정부 결정에 반기를 들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졸지에 지원금이 삭감된 스타트업들과 지원금을 믿고 투자·보육을 진행하던 민간 팁스 운영사의 한숨은 깊어지고만 있다.
'한국의 실수' 팁스, 희망에서 절망으로
팁스 프로그램은 초기 벤처기업의 성장을 견인하는 주요 정부 지원 사업이다. 선정된 기업에 상당한 지원 혜택이 돌아가는 만큼, 일각에서는 팁스를 '한국의 실수'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츠는 지난해 11월 팁스가 3년간 1,256건의 투자를 이끌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창업기획자(액셀러레이터)' 4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정부 역시 팁스 사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팁스 예산이 전년 대비 증액됐기 때문이다. 올해 팁스 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일반형 807억원 △딥테크 팁스 394억원 등 총 1,201억원으로, 지난해(859억원) 대비 눈에 띄게 증가했다. 혁신 기업을 위한 스케일업 팁스에는 지난해 대비 35.4% 많은 386억원이 투입된다. 아울러 정부는 국내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해외 벤처캐피탈이 먼저 투자하면 정부가 사업화 자금을 지원하는 '글로벌 팁스' 트랙을 신설할 예정이다.
전년도 지원금을 삭감당한 기업들은 종잡을 수 없는 정부의 예산 편성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일관성이 부족한 정책으로 인해 정부 지원 사업에 대한 신뢰가 훼손됐다는 비판이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지원 방향이 지나치게 글로벌 시장으로 편중돼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글로벌 팁스 트랙 신설, 글로벌 스타트업 전용 R&D 사업 등에 예산을 쏟아부으며 기존 팁스 수혜 기업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주장이다.
찬바람 부는 벤처 업계, 정부 온기까지 떠났다
정부 지원이 눈에 띄게 줄어들며 투자 혹한기 속 스타트업 '동사' 위험성이 커졌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중기부와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벤처투자액은 4조4,000억원로 2022년 상반기 대비 42% 감소했다. 같은 기간 펀드 결성 액수는 4조6,000억원으로 47% 줄었다. 2021~2022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벌어졌던 '유동성 잔치'가 끝나고, 고금리 기조·경기 침체를 중심으로 한 혹한기가 찾아온 것이다.
시장 유동성이 말라붙을 경우 투자자들은 기업의 실적을 투자의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다. 리스크를 감수하는 '모험'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같은 보수적인 투자 태도는 혁신을 목표로 삼는 벤처 업계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벤처기업협회가 지난해 9월 진행한 '벤처기업 투자유치 현황 및 애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 중 48.1%는 투자 유치 시 경험한 애로사항으로 '실적 위주의 보수적인 투자 심사'를 지목했다. 해당 조사는 투자 금액 합계 5,000만원 이상, 자본금 중 투자 금액 합계 비율 10% 이상 308개사가 참여했다.
벤처투자 정보 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해 투자 유치 이력을 보유한 국내 스타트업·중소기업 중 146개 업체가 폐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2022년(150개)에 이어 수많은 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수많은 스타트업의 성장을 이끌던 팁스 지원금이 감액된 가운데, 업계에서는 팁스의 '빈틈'을 메꾸지 못한 기업들이 그대로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