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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산업용 전기요금이 가정용 역전
2020년에 비해 산업용 전기료 63% 폭증
동남아 국가들, 값싼 전기료로 기업 유치
국내 제조업체가 내는 전기요금이 지난 3년간 16조원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한국전력의 적자를 줄이기 위해 2021년 이후 7차례에 걸쳐 산업용 전기요금을 63.3% 올린 영향이다. 반도체, 배터리 등 수출 주력 품목은 물론 뿌리 기업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전기료가 값싼 동남아시아 국가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산업용 전기요금 63% 오를 때 가정용 39% 올라
22일 한국경제인협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제조기업의 연간 전기료는 2020년 25조7,000억원에서 지난해 41조6,000억원으로 3년 새 15조9,000억원 증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제조기업에 적용하는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에 따른 결과다. 한국전력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kWh(킬로와트시)당 산업용과 가정용 전기 판매 단가는 각각 153.7원, 149.8원으로 4년 만에 산업용 전기가격이 가정용을 역전했다.
정부와 한전은 지난 2022년부터 6차례에 걸쳐 전기요금을 현실화하는 과정에서 가정용에 비해 산업용 전기요금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올렸다. 실제 지난해 전기요금을 2020년과 비교하면 산업용은 63.3% 오른 반면 가정용은 38.8% 상승하는 데 그쳤다. 특히 정부는 지난해 11월에는 대기업이 사용하는 대용량 산업용 전기만 kWh당 평균 10.6원 올리고 가정용 등 나머지 전기요금은 동결했다.
일반적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은 가정용보다 저렴하다. 고압 전기를 낮추는 변전소를 건설하고 각 가정으로 공급하는 배전망을 깔아야 하는 가정용 전기와 달리 산업용은 공장이 밀집한 산업단지에서 대량·고압의 전기를 한 번에 가져다 쓰기 때문에 원가가 낮고 이윤은 높다. 이런 이유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올리는 것은 한전의 수익에 도움이 된다. 지난해 한전의 전력 판매량 중 산업용 전기의 비중은 53%로 지난해 말 요금 인상으로 월 판매 수익이 2,000억원 증가했다. 올해는 최대 2조8,000억원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전기료 인상에 반도체·배터리·철강업체 부담 가중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한전은 한숨을 돌렸지만, 산업계에선 비용 증가라는 악재를 맞게 됐다. 특히 반도체나 이차전지 등 전력 사용량이 많은 주력 수출 품목이 타격을 입었다. 2022년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쓴 전력은 각각 2만1,731GWh, 1만41GWh로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은 총 3조7,000억원대로 추산된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말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추가로 지불해야 할 비용이 연간 각각 3,000억원, 1,350억원가량 늘어난 것으로 본다.
전력 사용량이 많은 철강업계와 시멘트업계도 부담이 커졌다. 철강업계의 생산원가 중 전기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 이상이다. 이처럼 전기료의 비중이 큰 철강업체들의 경우 전기요금이 kWh당 1원 상승하면 연간 부담은 100억원 정도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생산 설비를 꾸준히 돌려야 하는 시멘트업계도 생산 단가 중 전기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15~20%가량으로 핵심 원자재인 유연탄 다음으로 높다.
특히 전력 사용량이 많은 뿌리 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뿌리 기업은 제조업의 핵심적인 6가지 기본 공정 기술을 다루는 업체로 주조·금형·소성가공·용접·열처리·표면처리 등 6대 업종으로 구성된다. 전기 용해로를 쓰거나 표면 처리에 전기 분해 방식을 사용하는 등 전기를 사용하는 공정이 대부분이다. 전기요금이 제조 원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력 다소비 업종으로 지난해 뿌리 업종은 영업이익의 43.9%를 전력비로 지출했다.
더욱이 이들 뿌리 기업은 정부가 중소기업의 전기요금을 동결한다고 발표했음에도 전력 사용량이 많아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업종의 특성상 소규모 업체들이 모여 공동 수전 방식으로 계약전력을 정하는 탓에 매번 전기요금 인상 대상에서 벗어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일부 뿌리 기업의 경우 전기요금 지출이 전년 대비 40% 이상 늘어나기도 했다.
재계 "기업 부담 과중하고 형평의 원칙에 맞지 않아"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으로 국내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일각에서는 전기요금 산정 방식이 원가주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정용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하는 반면 산업용 전기요금으로 한전의 수익을 채우는 방식이 시장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도 "필수재인 에너지의 연이은 가격 인상으로 기업의 부담이 과도하고 형평에도 어긋난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실제 전기 판매시장이 개방된 대부분의 국가는 공급 원가가 싼 산업용 요금이 더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8월 발표한 2022년 기준 에너지 가격 통계에 따르면 OECD 38개 회원국 평균 산업용 전기요금 단가는 가정용과 비교해 25% 낮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가정용보다 더 비싼 나라는 튀르키예와 리투아니아, 헝가리, 멕시코 등 일부 국가뿐이다.
늘어나는 전기요금 부담에 일부 대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시설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LGU+는 유선망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망 교체 작업을 추진 중이다. 2026년까지 서울, 수도권, 6대 광역시의 광동축혼합망과 HFC망을 광가입자망과 FTTH망으로 교체할 계획이다. SK에너지는 열병합발전시스템을 적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CU는 일부 지점에 완전 밀폐형 냉장고를 도입해 전력 소모를 줄였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철강 업계에서도 전력 사용 감축을 위한 계획을 마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예 생산시설을 외국으로 이전하는 기업들도 있다.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낮은 전기료와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기업을 끌어들이고 있다. 일례로 태양광용 폴리실리콘 제조업체 OCI홀딩스는 생산원가의 40%를 차지하는 전기요금 급등에 전북 군산 공장 설비를 전부 떼어내 말레이시아로 이전했다. OCI 말레이시아 공장이 자리 잡은 사라왁주의 전기료는 밤에는 kWh당 41.2원, 낮에는 65.2원이다. 평균으로 따지면 한국(kWh당 153.5원)의 3분의 1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