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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국에 재정적 동참 압박 시도
日·카타르 선례, 관세 회피 등 목적
무역조건 완화로 직접 연결 안 돼

미국이 자국 제조업 재건을 명분으로 한국 등 동맹국에 투자 펀드 조성을 요구하면서 통상 전략의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단순 투자 유치에서 벗어나 동맹국이 자금을 직접 출자하는 방식으로 산업 회복을 뒷받침하라는 압박으로 해석된다. 앞서 일본과 카타르 등이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대미 투자와 관세 완화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익 확보는 담보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한국 역시 실질적 이익을 따지지 않은 채 정치적 논리에 휘말릴 경우, 통상 마찰의 반복을 피하기 어렵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민간 기업 자율적 투자로는 부족”
16일 외교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이달 초 미국 워싱턴DC에서 진행된 관세 협상에서 한국 측에 자국 제조업 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투자 펀드 조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주도해 ‘제조업 협력 강화 펀드’를 만들고, 이를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하거나 현지 기업에 투자할 재원으로 활용해 달라는 내용이다. 미국은 앞서 일본과의 관세 협상 과정에서 대두된 대미 투자 펀드 조성 방안을 거론하며 비슷한 규모의 펀드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이 제안한 대미 투자 펀드 규모는 4,000억 달러(약 550조원) 수준이다.
미국의 자국 제조업 재건을 앞당기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미국 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인 2010년대 후반부터 자국 기업의 리쇼어링(생산시설 국내 이전), 외국 기업의 직접투자 유도, 자국산 부품 사용 확대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왔다. 이번 대미 투자 펀드 조성 요구는 지금까지의 투자 유치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자국 내 산업기반을 부활시키기 위한 재정적 동참을 동맹국에도 압박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 같은 요구는 미국의 산업 전략 변화와도 맞물린다. 지난 수십 년간 해외 이전과 기술 유출로 경쟁력을 상실한 미국 제조업은 조선,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산업의 회복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단순히 민간 기업의 자율적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 간 협상 테이블에서 투자 여부를 논의하는 방식으로 판을 키우고 있다. 특히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에는 ‘안보를 제공하니 산업 투자로 보답하라’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면서 군사 동맹을 경제 파트너십으로 확장하고 있다.
외교계는 미국이 제시한 이번 요구의 ‘노골성’을 주목하는 모양새다. 자국 산업 부흥을 위한 미국 정부의 비공식적 투자 압박은 과거부터 이어져 왔지만, 이번에는 구체적 액수까지 거론되며 사실상의 청구서 형태로 전달된 만큼 사안이 중대하단 평가다. 우리 정부가 미국 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지는 아직 불투명하지만, 요구의 강도와 방식이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부담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게 외교계의 중론이다.
국가 차원 투자 약속, 양국 간 외교 수단화
미국의 제조업 재건 전략에 동참하겠다는 명분으로 직접적인 투자 약속을 내건 동맹국의 사례는 이미 존재한다. 앞서 언급했듯 일본은 조선업 분야를 중심으로 미국과의 공동펀드 조성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양국 간 경제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지난 5월 일본은 자국의 조선 기술력과 미국의 생산 기반을 결합하면 상호 이익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협력안을 미국 측에 제안했다. 이는 자동차 등 수출 중심 산업에 고율 관세가 부과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미국의 관세 압박을 산업 협력의 프레임으로 대응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중동의 카타르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미국에 접근했다. 카타르 국부펀드(QIA)는 향후 10년간 미국 제조업에 5,000억 달러(약 700조 원)를 투자한다고 발표했으며, 투자 계획에는 액화천연가스(LNG), 석유화학, 항만 인프라 등 자국의 전략 산업과 연계된 프로젝트가 주를 이뤘다. 이 때문에 카타르의 행보는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외교적 포석으로 읽힌다. 단순한 경제 투자보다는 정치·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자금 투입이라는 점에서 ‘국가 단위의 딜’에 가까운 접근 방식이다.
산업계는 이러한 투자 약속이 외교적 협상 카드로 활용되는 사실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국가 차원의 대규모 투자가 본래 취지였던 산업 협력보다는 통상 압박에 대한 ‘선제적 방어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단 이유에서다. 기업 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 미국 시장에서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영 판단이 정치 및 외교 환경에 지나치게 종속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미국이 특정 국가의 투자 약속을 일종의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면서 통상 외교의 비대칭성이 심화할 수 있다는 비판 또한 제기된다. 경제적 주권이 강한 국가는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는 일방적으로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실질적인 협상력 없는 자본 투입이 이뤄질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 수익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로 이어진다.

美 “양보 없는 협상 결과” 명분 축소
이는 일본이 대규모 투자 펀드 조성을 제안하고도 25%의 고율 관세 청구서를 받아들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현지 시각) 일본 상품에 대한 25%의 상호 관세를 발표하며 오는 8월부터 시행을 예고했다. 이는 4월에 발표한 24%의 ‘호혜적’ 관세에서 1%p 높아진 수치로, 천문학적 규모의 펀드 조성을 제안했음에도 통상 정책의 방향을 바꾸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더욱이 일본은 관세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의 공동 대응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역풍까지 맞았다. 미국 정치권과 일부 언론은 이를 ‘공동 전선 형성’으로 간주해 불쾌감을 드러냈고,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괘씸죄’로 받아들였다는 해석도 뒤따랐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략적 대응은 관세 완화를 유도하기는커녕 통상 마찰을 더욱 자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처럼 미국의 대외 무역정책은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적 판단에 크게 좌우되며, 상대국의 행동을 일관된 기준 없이 해석해 제재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무역 흑자국이라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아 온 한국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미국의 투자 펀드 조성안을 수용하더라도 미국의 통상 압박이 누그러질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상징성이 아닌, 실익 중심의 대응 전략이 시급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