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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 간 가스 운송 협정, 갱신 없이 만료 우크라 "러시아, 가스 수출로 전쟁 자금 마련" 러시아 가스 의존도 높은 슬로바키아 등 반발
우크라이나가 2020년부터 지속돼 온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송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하면서 유럽 내 에너지 안보와 가스 공급망에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번 결정은 러시아로 유입되는 전쟁 자금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유럽을 중심으로 글로벌 가스 가격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미국·중동·노르웨이 등 대체 공급원 전망
29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는 오는 31일 종료되는 러시아산 가스의 운송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가 자국을 통한 가스 수출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 전쟁 자금으로 사용한다고 지적했는데,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올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경유한 천연가스 판매로 50억 달러(약 7조3,000억원)를 벌어들였다.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산 가스를 유럽에 공급하는 대가로 연간 8억~10억 달러의 통과료를 받아왔지만,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앞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전쟁 발발 전인 2019년 말, 2020년부터 5년간 연간 평균 450억㎥ 규모의 가스를 우크라이나에 부설한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으로 수송하는 데 합의했다. 해당 파이프라인은 러시아에서 출발해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 여러 국가로 연결된다. 주요 목적지는 슬로바키아, 몰도바,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등이다. 이번 계약 만료 조치로 앞으로는 미국을 비롯해 카타르 등 중동에서 수입하는 액화천연가스(LNG)와 노르웨이 북해 가스전이 주요한 대체 공급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산 의존도 높은 국가들은 대안 모색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산 에너지 자원에 대한 수입 제재를 강화해 온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의 이번 결정에 대해 "이미 양국 간 가스 운송 계약 종료 시나리오가 가스 가격에 반영됐다"며 "이번 계약 종료가 유럽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지난 2년간 프랑스, 독일 등은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율을 크게 낮췄다. 한때 EU의 러시아산 가스 점유율이 40%에 달했지만,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통해 수송된 러시아산 가스는 약 150억㎥로 2018~2019년의 8%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EU 집행위원회의 입장과 달리 유럽 주요국에서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가격 상승과 전력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이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유럽의 가스 가격은 공급망 불확실성 확대에 더해 2년 만에 강추위가 맞물리면서 올해 들어 48% 상승했다. 최근에는 풍력 발전 등 재생에너지를 통한 전력 발전량이 줄어들면서 가스 비축량이 빠른 속도로 소진되자 '2022년 에너지 위기'가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마저 증폭되고 있다.
특히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가스 공급을 받는 국가들은 가스 공급 중단 위기에 더욱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러시아 천연가스 국영 기업 가스프롬으로부터 매년 30억㎥의 가스를 공급받는 슬로바키아는 "러시아산 가스 운송이 중단될 경우 EU 회원국들은 향후 2년간 추가로 1,200억 유로(약 184조7,000억원)의 에너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도 "러시아산 가스 운송 중단은 단순히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결정"이라며 "이는 EU 모두가 부담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슬로바키아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도 우크라이나가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을 경유하는 방안이 고려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국영석유회사인 소카르(SOCAR)가 러시아산 가스를 받아 슬로바키아의 가스산업 주식회사(SPP)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헝가리는 러시아산 가스 소유권을 국경 지점에서 유럽 구매자가 넘겨받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EU와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유럽 구매자가 소유한 가스를 운송할 의무가 부과된다.
러시아, 몰도바에 가스 공급 중단 보복 조치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보복 조치로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 전체를 중단할 가능성도 제기된다.실제로 지난 28일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은 몰도바가 가스 사용료를 미납했다며 내년 1월 1일부터 별도 통지가 있을 때까지 가스 공급을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몰도바는 해마다 러시아로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트란스니스트리아로 이어지는 가스관을 통해 천연가스 20억㎥를 공급받아 왔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내 러시아계 주민들이 밀집한 곳으로, 분리·독립 요구로 몰도바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
러시아의 조치에 대해 도린 레케안 몰도바 총리는 "러시아가 한겨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을 전기와 난방이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며 "에너지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이번 조치가 우크라이나를 통한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하려는 시도를 예고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2020년 몰도바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뒤 몰도바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앞서 지난 2022년에도 천연가스 사용료를 내지 않았다며 공급 중단을 선언한 바 있다.
이에 EU는 러시아산 에너지 자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내년 2월에는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하지만 대러시아 제재가 계속됨에도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스위스, 영국 등 유럽 주요국이 러시아로부터 LNG를 들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5월 기준 유럽의 가스 수입량 중 15%가 러시아산으로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산(14%)을 추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