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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렛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소송'서 패소 자기 자본 9배에 육박하는 핵폭탄급 배상금 연이은 소송 리스크에 유증 철회, 주가 급락
웨어러블 인슐린 펌프 전문기업 이오플로우가 미국에서 진행 중인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패소해 수천억원을 배상할 위기에 처하자 주가가 연일 폭락하고 있다. 이에 이오플로우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당초 예정된 385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유상증자를 철회하는 등 패소 여파 수습에 나섰다.
인슐린 펌프 '이오패치'의 영업비밀 침해 인정
9일 투자(IB)업계에 따르면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매사추세츠 지방 법원은 미국의 의료기기 회사 인슐렛 코퍼레이션이 이오플로우를 상대로 제기한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인슐렛의 손을 들어줬다. 2005년 인슐렛은 세계 최초로 일회용 웨어러블 인슐린 펌프인 ‘옴니팟’을 개발했는데, 2022년 웨어러블 인슐린 펌프 ‘이오패치’ 개발에 성공한 이오플로우가 영업비밀방어법(DTSA)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지난해 8월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지방법원 배심원단은 인슐렛이 주장한 5건의 영업비밀 중 4건에 대해 이오플로우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면서 이 중 3건의 영업비밀 탈취 행위는 고의적·악의적(willful and malicious)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오플로우가 인슐렛에 손해배상(compensatory damages) 1억7,000만 달러, 징벌배상(punitive damages) 2억8,200만 달러 등 총 4억5,200만달러(약 6,337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평결을 내렸다. 이 배상금은 이오플로우가 보유한 자기 자본(722억원) 대비 877%에 해당하는 금액이자, 시가총액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오플로우는 영업비밀 침해 소송의 1심 배심원 평결에 대해 매우 실망스럽다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회사 측 관계자는 "미국 배심원 평결에 따른 배상액이 상당히 크지만 본 배상액은 최종 금액이 아니다"라며 "최근 항소 법원의 가처분 취소 재판에서 승소한 만큼 해당 재판의 판시 내용 등이 향후 본안 소송의 항소심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항소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유럽 가처분 소송서 승소하며 유통 재개
이오플로우와 인슐렛은 미국을 넘어 유럽에서도 법정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유럽에서도 양 사 간 특허 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이오플로우가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따르면 인슐렛은 지난 6월 말 이오플로우와 유럽연합(EU) 지역 유통 파트너사인 메나리니를 상대로 이오패치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유럽에서 가처분 신청이 인용될 경우, 영업정지 처분에 따른 상장 적격성 실질 심사를 받아 주권이 매매 거래가 정지될 수 있다.
문제는 피소 사실이 대규모 유상증자가 결정되면서 뒤늦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지난 8월 이오플로우는 823억원 규모의 유증을 결의했다. 유증 전까지 시장에서는 미국 연방 법원에서 인슐렛이 제기한 모든 가처분을 취소하는 결정이 이뤄졌다는 사실만 알려져 미국과 유럽에서의 판매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이런 상황에서 인슐렛이 유럽에서도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임에도 유증이 결정되고서야 증권신고서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 같은 뒷북 공시에 당시 이오플로우의 주가는 하한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지난달 유럽통합특허법원(UPC) 밀라노 중앙법원이 인슐렛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원고가 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특허의 유효성이 피고가 제출한 제3자 선행 특허에 의해 의심되므로 원고의 신청을 기각한다"고 판결하면서 이오플로우는 UPC 회원국인 오스트리아·벨기에·불가리아·덴마크·스웨덴 등 17개국에서 이오패치 유통을 재개할 수 있게 됐다. 이에 인슐렛은 해당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UPC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할 할 경우 이오플로우의 해외 판매의 걸림돌도 일부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패소 여파에 유상증자 철회, 소액주주만 피해
한편 이오플로우는 본안 소송인 미국 영업비밀 침해 소송의 패소 여파로 지난 6일 당초 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 방식으로 추진하려던 유증을 철회한 상태다. 운영·시설자금, 채무상환자금 조달을 위해 910만 주의 신주를 발행해 385억원을 조달하는 유증으로 오는 23일 납입이 예정돼 있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철회 사유는 '인슐렛과의 특허권 침해 소송 배심원 평결 패소에 따른 투자자 보호'로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해 이오플로우는 "최근 미국 지방 법원의 배심원 평결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기존 주주와 신규 투자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판단하에 이번 유증을 부득이하게 철회하기로 결정했다"며 "대표이사 및 특수관계인 등이 당초 유증 참여를 위해 자금을 마련한 바 있어 유증 철회와 무관하게 확보된 자금은 회사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오플로우의 유증 일정이 상당 기간 진행된 후에 철회가 결정된 탓에 기존 주주들의 피해는 복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유증에 따른 권리락(신주배당 권리 마감)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유증에 참여하기 위해 주식을 매수했던 투자자들은 권리락으로 인한 주가 하락만 겪고 유증 참여 권리도 잃어버린 셈이다. 당시 권리락으로 줄어든 이오플로우 시가총액은 109억원으로 전일 시총(823억원)의 13.24%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지난달 25일 신주인수권증서 '이오플로우19R'가 상장폐지되면서 권리락 이후 유증 참여를 위해 신주인수권증서를 매매한 투자자도 손실을 보게 됐다. 신주인수권증서는 유증 참여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발행한 가상의 종목으로, 유증 참여를 원하는 투자자는 신주인수권증서를 매수해 참여할 수 있지만 유증 자체가 철회됨에 따라 거래기간(11.18.~11.25.)에 이오플로우19R을 매수했던 투자자들은 돈만 날린 꼴이 됐다.
주가 사흘 연속 하한가, 상폐 우려도
줄소송에 이어 이오플로우를 둘러싼 리스크가 확대되면서 최근 주가도 연일 하한가를 경신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오플로우는 종가 기준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3일 연속 하한가에 마감했다. 지난 3일 1만960원이었던 주가는 지난 6일 종가 3,770원으로 65.6% 급전직하했다. 지난달 말까지만 해도 이틀 연속 상한가까지 치솟으며 1만원을 돌파했지만, 일주일도 안 돼 다시 1만원선을 내준 것이다. 9일 장에서도 오전 10시 기준 10%대 하락하며 3,315원에 거래되고 있다.
이에 개인 투자자의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하한가를 기록한 사흘간 개인 투자자는 이오플로우를 40억원어치 순매수했다. 이들의 평균매수가는 5,072원으로 현재가 대비 1,700원가량 높다. 아직 이오플로우를 팔지 않은 경우 손실률이 34.64%에 달한다. 1억원을 순매수했다면 3,400만원 이상 잃은 셈이다. 시장은 개인 투자자들이 급락한 종목의 기술적 반등을 노린 매매 기법으로 이른바 '하따(하한가 따라잡기)'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오플로우의 상장 폐지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미 시가총액이 3분의 1토막이 난 상황에서 항소심을 통해 배상금 규모가 이대로 확정될 경우 상폐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오플로우는 추가 자금 조달을 위해 자회사 지분 매각 등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 이오플로우가 차기 동력으로 밝혀왔던 비만 패치 개발에도 차질이 예상되는 등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 가치도 하락할 것으로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