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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북한군 사상자 수십명” 첫 공식확인 우크라, 북한군 추정인 시신 소각 영상 게시 "러시아, 북한군 사망 은폐·신원 위장에 급급"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 파병된 북한군 중 수십명이 우크라이나군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다치거나 숨졌다고 밝혔다. 미 당국이 북한군 교전 및 사상자 발생을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북한 군인의 시신을 태우고 있다며 영상을 공개했다.
젤렌스키 "러시아, 북한군 파병 은폐"
17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과 팻 라이더 미 국방부 대변인은 전날 북한군이 격전지인 러시아 쿠르스크에서 우크라이나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사상자 규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순 없으나 수십명에 달해 “대수롭지 않은 피해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매슈 밀러 국무부 대변인도 이날 “쿠르스크에 배치된 북한군은 전투에 참여했고 전투원으로서 우크라이나군의 합법적 표적이 됐다”며 “(그들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독립 주권국(우크라이나)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수행하려 한다면 러시아와 북한 정부의 확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10월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북한군은 1만여 명 규모로, 러시아가 탈환 작전을 펼치는 쿠르스크 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8월 이 지역을 기습 공격해 일부 점령했다. 앞서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GUR)은 지난 주말 쿠르스크에서 벌어진 교전으로 북한군 최소 30여 명이 다치거나 숨졌다고 주장했는데, 미 당국은 북한군 사상 소식을 이날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같은 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북한군의 전사 사실을 확인시켰다. 그러면서 러시아가 파병된 북한군 신원을 감추기 위해 전사자 얼굴까지 소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에는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향해 “노, 노”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고는 자리를 피하는 장면도 포함됐다. 또한 우크라이나 방어선에 배치된 북한군이라며 병사 한 명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모습도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해당 영상을 근거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방어선 공격에 북한군이 투입된 사실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병력 손실까지 은폐하려 한다”면서 “북한군은 훈련받을 때에도 얼굴을 노출하는 것이 금지돼 있으며, 우리와 전투를 마친 뒤에는 전사한 북한 병사의 얼굴을 말 그대로 불태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러시아에 만연한 인간성의 말살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신뢰할 수 있고 지속 가능한 평화와 러시아에 대한 책임 추궁을 통해 이를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미·EU, 대러 독자제재
러시아가 북한군 투입 사실을 은폐하는 이유 중 하나로 서방국들의 대러시아 독자제재가 꼽힌다. 북한군 파병이 UN(국제연합) 안전보상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7일 우리나라와 미국, 유럽연합(EU)은 일제히 우크라이나전에 파병한 북한 고위급 장성 등을 독자제재했다. 이번 독자제재는 한미일 등 10개국과 EU가 전날 공동성명에서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을 포함한 북러 군사협력 증대를 규탄하며 공언한 '경제 제재 부과를 포함한 공조'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우리 정부 제재 리스트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돼 러시아를 지원하는 김영복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신금철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처장, 북한군 소속 미사일 기술자 리성진 등이 올랐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견된 북한 폭풍군단(11군단)과 그 단장 리봉춘도 제재 대상으로 지정됐다.
북러 무기거래에 관여한 러시아 개인과 기관도 무더기로 제재했다. 라파엘 아나톨리예비치 가자랸과 그가 대표로 있는 라포트, 트랜스 캐피탈은 북러 무기거래 과정에서 물질적·금전적·기술적 지원을 제공한 것으로 파악됐다. 알렉세이 부드네프와 그가 대표로 있는 테크놀로지는 러시아군 지원을 위해 북한산 군용 통신장비를 운송했고, 바그너그룹 소속인 파벨 파블로비치 셰베린은 북러 간 무기 운송에 관여했다. 기관 베루스는 북러 무기 거래에 관여했다.
또 로만 아나톨리예비치 알라르와 그가 대표로 있는 파르세크는 미사일 관련 핵심물자와 기술을 북한에 공급했다. 이고르 알렉산드로비치 미추린과 그가 관리하는 아르디스-베어링스는 안보리 제재대상인 조선단군무역회사를 지원해 북한 핵·미사일 개발을 지원했다. 아울러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가예보이와 그가 관리하는 아폴론,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차소브니코프와 그가 대표로 있는 질-엠 및 알케이-브리즈는 북한의 방위산업을 지원하는 연봉무역총회사 소속으로 우리 독자제재 대상인 박광훈의 대북 물자 조달 활동을 지원했다.
이번 독자제재는 관보 게재를 통해 오는 19일 0시부터 시행된다. 제재 대상과의 금융거래 및 외환거래는 각각 금융위원회 또는 한국은행 총재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며, 허가받지 않고 거래하면 관련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
북·러, 상호 조약 근거로 '집단 자위권' 주장
하지만 북한과 러시아는 이번 파병이 정당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10월 말 뉴욕 UN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서 바실리 네벤자 주UN 러시아 대사는 북한군 파병에 대한 서방의 비판이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시도”라고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미국과 동맹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젤렌스키 정권에 군사력과 정보를 지원할 권리가 있는 반면 러시아의 동맹국은 비슷한 일을 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를 모두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며 북한군 파병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김성 주UN 북한 대사도 “전쟁 발발 후 미국과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전차, 전투기 등 다양한 무기 공급을 확대해 왔다”며 “중요한 점은 우크라이나가 지난 6월 러시아 영토를 향해 미사일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과 러시아는 정치·경제·군사·문화를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양자 관계를 발전시킬 권리가 있고, 이는 북·러 조약에 따라 국제법상 규범에 완전히 부합한다”며 “만약 러시아의 주권과 안보 이익이 미국과 서방의 지속적인 위험한 시도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과 러시아가 지난 6월 맺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의 제4조에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로부터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는 경우 상대방은 UN 헌장 제51조와 북한과 러시아 연방의 법에 준해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한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돼 있다.
UN 헌장 제51조는 UN 회원국에 무력 공격이 있을 경우 개별적ㆍ집단 자위권을 가질 수 있다고 규정한 조항이다. 개별 자위권은 자국이 타국의 공격을 받은 경우 자국과 국민을 방어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며, 집단 자위권은 동맹국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은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8월 러시아 본토를 공격해 일부 지역을 점령한 곳이기에 북러 조약의 제4조에 적용된다고 북러 양측은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즉 북한과 러시아는 이 조약에서의 '자위권'을 강조하면서 자국과 동맹국을 지키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