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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 '엔비디아 의존도' 낮추려는 시도 브로드컴의 맞춤형 AI 칩 XPU 수요 급증 구글·애플·메타 등 빅테크 기업 고객 확보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인공지능(AI) 칩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다. 엔비디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빅테크들이 '맞춤형 반도체(에이식·ASIC)'에 특화된 브로드컴과 앞다퉈 손을 잡으면서 엔비디아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4분기 실적 발표 이후 뉴욕증시에서는 브로드컴 주가가 폭등하면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넘어섰고 투자은행(IB)들도 일제히 목표주가를 상향했다.
브로드컴 CEO "맞춤형 AI 칩 XPU 시대 올 것"
18일(현지 시각) 미국 투자 전문매체 더스트리트에 따르면 브로드컴의 혹 탄(Hock Tan)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2일 2024 회계연도 4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향후 AI 칩 시장은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GPU(그래픽 처리 장치)에서 맞춤형 실리콘 칩, 특히 XPU(eXtreme Processing Unit)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AI 칩 시장에서 XPU가 강력한 범용성을 기반으로 하는전력소비, 비용 등 효율성과 성능 측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으며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브로드컴은 이미 맞춤형 AI 칩을 개발해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MS) 애저(Azure) 등에 공급하고 있다. 최근에는 애플과 오픈AI가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브로드컴과 자체 AI 칩 개발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기에 더해 브로드컴은 올해 4분기 중 3곳의 하이퍼스케일 고객을 추가 확보해 차세대 AI XPU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더스트리트에 따르면 새로 확보한 하이퍼스케일 고객은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페이스북의 운영사 메타, 틱톡의 모회사인 바이트댄스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관련해 브로드컴은 4분기 실적 발표에서 "신규 고객 확보와 수요 증가 등에 힘입어 올해 XPU와 이더넷 네트워킹 칩을 포함한 AI 매출이 전년 대비 220% 증가한 122억 달러(약 17조6,800억원)에 달했다"고 보고했다. 브로드컴의 4분기 전체 매출은 141억 달러(약 20조4,4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51% 증가했으며 AI 매출은 전체 반도체 매출의 40%를 차지했다. 이날 탄 CEO는 "향후 3년간 AI 분야에서 지속적인 성장 기회를 예상한다"며 "2027년까지 AI 가속기와 네트워킹 부품 시장이 600억~9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美 증권가, 최근 브로드컴 목표주가 일제히 상향
브로드컴은 4분기 실적 발표 다음 날인 지난 13일 시가총액 1조 달러(1,450조원)를 돌파하며 TSMC를 제치고 시총 8위에 올랐다. 당일 브로드컴의 주당 일일 상승률은 24.4%로 2008년 8월 브로드컴의 전신인 아바고 테크놀러지스가 상장한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주가 상승률도 118%에 달했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통신은 "AI 칩 업계의 최대 수혜기업인 엔비디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글로벌 빅테크 업계를 비롯해 전 세계 칩 수요에 부응할 반도체 업계 총아로 입지를 굳힌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1991년 설립된 브로드컴은 2000년대 이후 활발한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2015년에는 싱가포르 기반 기업인 아바고 테크놀로지가 브로드컴을 370억 달러(약 53조6,500억원)에 인수하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8년에는 1,200억 달러(약 174조원)를 들여 경쟁사인 퀄컴 인수를 추진했지만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싱가포르가 중국 기업인 화웨이와 지리적으로 너무 가까이 위치해 있다는 점을 들어 '국가 안보적 위협'이라는 이유로 비승인 행정명령 처분을 내렸고 결국 인수는 무산됐다.
이를 계기로 탄 CEO는 본사를 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이전하고, 미국 내 관련 기업을 인수해 기술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2018년 레거시 소프트웨어 공급업체인 CA 테크놀러지스를 190억 달러에 매입했고, 2019년에는 보안 소프트웨어 기업인 시만텍을 1,007억 달러(약 146조원)에 인수했다. 그 결과 브로드컴은 지난 6년간 반도체 제조업체에서 종합 소프트웨어 인프라 공급기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다국적 미국 기업으로 등록돼 있다.
최근에는 AI 칩 광풍 속에서 글로벌 빅테크와의 계약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시장 평가도 달라졌다. 이달 들어 글로벌 IB 중 최소 16곳이 브로드컴의 목표주가를 일제히 상향했다. JP모건,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은 목표주가를 250달러로 상향했고 트루이스트, 바클레이스도 목표주가를 각각 205달러, 260달러로 높여 잡았다. 골드만삭스도 "브로드컴의 맞춤형 반도체에 대한 대형 고객사 대규모 수요 유입을 감안하면 향후 매출과 수익이 많이 늘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며 "며 목표가를 기존 190달러에서 240달러로 높였다.
'상호보완' 엔비디아·브로드컴, 동반 성장 가능성
아직 브로드컴의 AI 칩 매출은 엔비디아의 실적에 미치지 못하지만 전문가들은 "최근 미국의 전통 칩 제조기업인 인텔이 경영난으로 인해 CEO 퇴진 등 기업 구조 재조정에 착수하면서 브로드컴이 큰 반사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며 향후 실적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시총만 보면 브로드컴은 이미 미국의 반도체 기업 AMD를 넘어섰다. 탄 CEO는 "맞춤형 실리콘 칩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브로드컴은 이 시장을 주도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AI 칩 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엔비디아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장의 움직임도 브로드컴에는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AI 가속기 시장 90%를 차지하는 엔비디아를 통해 제품을 공급받고 있지만, 비싼 가격과 공급량 부족으로 인한 대기, 에너지 효율 문제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데이터 보안 문제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현재 브로드컴으로부터 AI 칩을 공급받고 있는 구글, MS, 아마존 등은 엔비디아의 주요 매출처 중 한 곳이었지만 브로드컴과도 손을 잡으면서 '탈(脫)엔비디아'의 첫 번째 주자가 됐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XPU의 부상이 엔비디아의 독주 체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전문가 사이에서는 두 회사가 서로 다른 영역에서 경쟁하며 AI 칩 시장을 함께 키워나갈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 캐피털마켓 래버러토리스의 오피르 고틀리브 CEO는 "XPU와 GPU는 서로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두 가지 유형의 AI 칩에 대한 수요가 모두 증가하면서 브로드컴과 엔비디아 모두 성장할 것"이라며 "엔비디아는 범용 GPU 시장에서, 브로드컴은 맞춤형 실리콘 칩 시장에서 각자의 강점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