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USAID·CFPB 폐지 또는 축소 위기
일론 머스크 사퇴 촉구 시위 이어져
‘지지’ 트럼프, ‘거리 두기’ 백악관

일론 머스크를 위시한 미국 정부효율부(DOGE)가 연방정부 지출 삭감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면서 공직사회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여러 정부 기관이 폐지 또는 축소 수순을 밟고 있으며,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공무원도 다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 기관의 비효율적 운영을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DOGE의 성과를 치켜세우고 있으나, 머스크가 권한을 남용해 ‘초법적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비판 또한 거세지는 양상이다.
소송 불사 공무원들, 성난 민심은 테슬라 매장 방화
20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워싱턴DC 연방법원은 지난 7일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직원 2,200명을 유급 행정 휴가로 돌리고 해외 파견 인력을 소환하려던 연방정부 계획에 대해 잠정 중단을 명령했다. 다음 날 뉴욕 남부연방법원도 DOGE 직원들의 재무부 결제 시스템 접근권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다만 이는 임시적 조치로, 최종 판결은 상급 법원의 판단 이후 확정될 전망이다.
이번 조치는 미국 정부 기관을 겨냥한 머스크와 DOGE의 ‘광폭 행보’에 대한 반발의 결과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당선 직후 머스크를 DOGE 수장으로 공식 발표하면서 머스크가 연방정부의 관료주의를 해체하고, 과도한 규제와 낭비성 지출을 줄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DOGE를 “우리 시대의 ‘맨해튼 프로젝트’”라고 정의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의미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는 당시 전쟁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듯 DOGE는 출범과 동시에 다수의 정부 조직과 정책에 칼날을 들이댔다. 가장 먼저 미국의 해외 원조와 개발 협력 업무를 수행하는 USAID가 표적이 됐다. 1만 명에 달하는 USAID 전체 인력 중 대부분이 해고됐고, 최고 보안 책임자 2명은 기밀 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미 정부는 USAID의 일부 기능만 국무부 산하로 통합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기관 폐쇄 절차를 밟고 있다.
머스크가 자신의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없애야 할 기관’으로 꼽은 소비자금융보호국(CFPB)도 폐지 위기에 처했다. 직원들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CFPB 본부 건물도 잠정 폐쇄됐다. 이에 노조를 비롯한 구성원들은 이를 중단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14일 워싱턴DC 연방 판사는 “해당 기관은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대규모 감원을 할 수 없다”며 직원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결정에 따라 DOGE의 조준선 상에 있던 금융 규제 기관의 모든 해고와 자금 이동도 일시 중단됐다.
머스크와 DOGE에 반대하는 여론은 비단 공직사회 내에 국한하지 않는다. 시위대를 자처한 많은 국민이 트럼프 대통령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머스크를 행정부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15일에는 뉴욕과 시애틀 등 여러 도시의 테슬라 전시장 앞에서 머스크와 DOGE에 항의하는 시위가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특히 오리건주, 콜로라도주 등 매장에서는 방화 또는 방화 시도까지 이어지면서 갈등의 격화를 알렸다.
‘미국 대통령의 날’로 불리는 17일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50개 주, 50개 시위, 1일’을 의미하는 활동 단체 ‘50501’의 주도로 전개된 이날 시위에서 참가자들은 “머스크는 대통령이 아니다”, “머스크를 멈춰라” 등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드니 윌슨 50501 언론 담당은 “우리는 줄곧 일론 머스크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며 “그와 같은 접근 권한을 가진 비정부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우려스럽다”고 강조했다.
머스크 향한 전폭적 지지 재확인한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은 거센 비판 여론과 머스크의 ‘비선 실세’ 논란에 정면 돌파로 맞섰다. 18일 방영된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머스크가 확인한 낭비와 사기, 남용, 부패는 전체의 1%에 불과하다”며 “부정한 계약 등 발견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이어 “머스크는 낭비된 돈 1조 달러를 더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산 감축 고삐를 더욱 바짝 죌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 머스크에 대한 찬사로 전폭적인 지지를 재확인한 셈이다.
이날 인터뷰에는 머스크도 동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내내 강하게 동조한 그는 “연간 2조 달러에 달하는 적자를 물려받아 미칠 노릇”이라며 “개인이 과소비하면 파산하듯, 누적된 적자를 관리하지 못하면 나라도 파산할 수밖에 없다”고 힘줘 말했다.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되지 않았음에도 과도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런 걱정을 할 바엔, 연방정부 조직 내 선출되지 않은 수천 명의 인력을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두 사람은 머스크가 운영하는 기업들이 연이어 대규모 정부 주도 사업을 수주하고 있다는 ‘이해 충돌’ 논란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머스크의 주요 사업체 테슬라의 사례를 들며 “오히려 보조금이 삭감되지 않았나”라고 반문하며 “보조금 삭감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떠한 대화도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머스크를 향해 “만약 이해 충돌이 발생한다면, 당신은 업무에서 즉각 배제될 것”이라고 말했다. 머스크 역시 당연하다며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긍정했다.

DOGE 신설 행정명령, 관리자 특정 안 해
이런 가운데 백악관은 머스크가 미국 정부 내에서 실질적 혹은 공식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조슈아 피셔 백악관 행정국장이 18일 워싱턴DC 연방법원에 제출한 서면에서 머스크의 직함을 “대통령의 수석 고문”이라고 명시하면서다. 피셔 국장은 “머스크는 다른 고문들과 마찬가지로 정부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잘라 말하며 “그의 직책은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고문이었던 아니타 던의 역할과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해당 서면은 미국 14개 주 민주당 소속 법무장관들이 제기한 소송에 대한 답변 취지에서 작성됐다. 앞서 이들 법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비공식 정부 기관인 DOGE를 설립했다는 점을 문제 삼으면서 머스크에게 주어진 권한 역시 상원의 인준을 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의회 입법으로 설립되지 않은 정부조직과 선출되지 않은 개인이 아무런 견제 없이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이들 법무장관의 논조다.
한편 백악관이 머스크의 실질적 권한을 부인하고 나서면서 DOGE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의 역시 뜨거워진 양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DOGE 신설 행정명령에는 “대통령실 산하에 ‘미국 정보효율 서비스(USDS, DOGE의 공식명칭)’ 관리자를 두며, 해당 관리자는 백악관 비서실장에게 업무의 주요 내용을 보고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해당 관리자의 이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비(非)정부 인사인 머스크의 DOGE 활동이 앞으로도 화제의 중심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