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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태국 등 미국 우군 자처 기업 탈중국 행렬에 반사이익 기대 신흥국 한계, 글로벌 경제 위기에 취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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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무역 갈등 중인 미국이 동남아시아 내 자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다양한 카드를 저울질하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미국이 중국을 대체할 글로벌 통합 공급망으로 동남아 일대를 활용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으며, 이들 국가 또한 대규모 반사이익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고 있다. 다만 일각에선 관세로 대표되는 미국 우선주의의 칼날이 언제든 아시아를 향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짙어지는 양상이다.
관세 우려에 신중한 대응 나선 동남아
21일(이하 현지시각) 닛케이아시아 등 외신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행정부는 최근 동남아 국가들과 협력 강화 등 전면적인 경제 전략 재설정을 검토 중이다. 그간 미국은 동남아 일대를 중동이나 유럽보다 후순위로 취급해 왔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중국을 대체할 생산 기지로 손색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지정학적로도 동남아는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꼽힌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은 물론,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사이 약 1,000km에 달하는 말라카해협은 세계 최대 해상교통로로 불린다. 블룸버그는 “풍부한 자원과 글로벌 통합 공급망, 자유 무역 접근성, 약 7억 명에 달하는 인구를 갖춘 동남아는 2030년까지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는 저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까지 미국의 영향력은 다소 미약했다는 평가다. 지난 10년간 동남아 외국인직접투자(FDI)에서 미국은 중국에 620억 달러(약 90조원) 뒤처졌다. 무역규모에서도 2023년 기준 4,995억 달러(약 720조원)로 중국(7,020억 달러·약 1,010조원)을 크게 밑돌았다. 중국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발효해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정치·안보 동맹 선택지를 제한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을 대하는 동남아 국가들의 태도에 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보편관세 적용을 선언하면서 수출 분야에 막대한 타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먼저 베트남은 적극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팜 투 항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13일 “우리는 건설적이고 협력적인 방식으로 미국과 교류를 유지하고, 정보공유 강화와 상호이해 증진으로 경제협력을 더욱 강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태국도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 형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피차이 나립타판 태국 상무부 장관은 직접 미국을 방문해 무역 담당 관료들과 만나고, 이 자리에서 미국산 에탄 수입을 최소 100만t(톤) 늘린다는 계획을 전달하며 협력 강화를 다짐했다. 미국은 태국의 두 번째 교역국으로, 태국은 지난 한 해에만 354억 달러(약 51조5,778억원) 상당의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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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자본 몰렸지만, 불확실성 여전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세계 기술 기업의 ‘탈(脫) 중국’ 움직임이 가속하고 있다는 점도 동남아 국가들에는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과거 많은 기업이 중국 이외 지역에서 공급원을 늘려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1)’ 전략을 취했다면, 최근에는 미국의 관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중국 말고 어디든지(Anything But China·ABC)’라는 의미 ‘ABC’가 새 원칙이 됐기 때문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기업들이) 제품 조립만 중국 이외 지역으로 이전했던 전과 달리 현재는 센서와 인쇄 회로 기판, 전력 전자 장치 등 부품 제조 공장도 이전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제조 및 공급업체들의 사례를 들었다.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와 램리서치는 지난해 중국 기업을 공급망에서 제외했으며, 반도체 생산 전력 시스템을 생산하는 어드밴스드에너지도 오는 7월 중국 공장을 폐쇄한다.
과거 중국으로 몰리던 자본도 대거 동남아로 방향을 바꿨다. 2023년 동남아의 외국인 FDI는 2,300억 달러로 2018년 1,550억 달러에서 70%가량 증가했다. 칩 제조업체 인텔, 인피니온, 마이크론 등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고, PC 제조업체 HP는 태국을 주요 생산 기지에 포함했다. 또 엔비디아는 지난해 12월 베트남 연구·개발 센터 설립을 발표하면서 동남아 국가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을 둘러싼 위험 요소 또한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미중 무역 전쟁으로 글로벌 경제가 흔들리면, 동남아 신흥국 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남중국해 등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실리를 추구해 온 동남아 국가들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관세 문제 또한 부정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 중인 만큼 동남아 국가에 대한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관세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조언이다. 골드만삭스는 “트럼프 취임으로 관세 인상 우려가 커진 국가가 중국만은 아니다”라고 짚으며 “트럼프 1기 행정부 이후 대중 적자는 소폭이나마 감소했지만, 다른 아시아 수출국에 대한 무역 적자는 여전히 막대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동남아 국가들로선 마냥 장밋빛 미래만을 기대하긴 힘들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원조 중단으로 긴장감 부여-군사 동맹은 확고
우려는 일정 부분 현실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국외 개발 원조 일시 중지’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미국 원조에 의존하던 동남아 내 각종 사업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의 지뢰 제거 사업을 꼽을 수 있다. 리 투치 캄보디아 선임 장관은 “미국은 캄보디아 지뢰 제거에 연간 약 1,000만 달러(약 146억원)를 제공하는 핵심 파트너”라고 짚으며 “미국의 지원 중단으로 93개 작업 팀이 악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보건 현장에도 충격파가 미쳤다. 라오스와 미얀마에서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원조로 운영되던 △산모·영아 지원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프로그램이 직접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를 두고 영국 가디언은 “USAID는 그간 캄보디아 미얀마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결핵 예방 프로그램, 부패 방지와 기후변화 대응, 아동 보호·교육, 인신매매 방지 자금을 지원했다”며 “미국의 원조 철회가 아시아의 빈곤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미국은 군사적 동맹에서는 상호 방위 조약에 대한 변함없는 의지를 밝히는 등 유대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달 12일 캐나다·필리핀 군과 함께 진행한 남중국해 합동순찰과 관련해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장관은 “우리는 남중국해의 질서를 재확립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필리핀 군의 역량과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1951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안정하고 번영하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유지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