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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사절단-美상무장관 면담
현 행정부 임기 내 투자 성과 강조
보조금 집행 여부는 불확실성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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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산업 활성화에 주력 중인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들에게 구체적인 투자 기준으로 1조4,000억원 규모를 언급한 것으로 파악됐다. 산업계는 이 같은 투자 기준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오는 4월께 발표될 미국 정부의 보조금 정책을 예의주시하는 모습이다.
“의무는 아니지만, 신속한 절차 위해”
23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신임 상무부 장관은 지난 21일 미국을 방문 중인 한국 경제 사절단과 회동했다. 워싱턴DC 모처에서 이뤄진 이날 회동에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삼성, 현대차, LG, 한화 등 그룹 총수들이 참석했다.
약 40분에 걸친 이번 면담에서 러트닉 장관은 우리 기업인들에게 적극적인 대미 투자를 권유하며 최소 10억 달러(약 1조4,000억원)라는 액수를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아가 트럼프 2기 행정부 임기 내 투자 성과가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전언이다. 공장 착공 등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미 정부 관계자는 “10억 달러를 투자 의무 기준으로 제시한 건 아니다”라면서도 “그 이상이면 신속하게 절차를 밟아 주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같은 날 ‘미국 우선주의 투자 정책’ 각서에 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각서에서 “첨단 기술 분야에서 동맹의 큰 규모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간소화 절차, 즉 ‘패스트트랙’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10억 달러 이상 모든 투자의 환경 평가를 빠르게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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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점에선 IRA 폐지 가능성 낮아
산업계에서는 ‘10억 달러’라는 금액 기준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분위기다. 대기업의 경우 대미 투자 규모가 대부분 해당 기준을 웃도는 만큼, 진정한 패스트트랙은 별도의 협상 테이블에서 정해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최태원 회장 역시 “필요한 투자는 계속 검토할 것이지만, 미국 측의 인센티브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 회장은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내 생산 시설을 원하지만, 투자를 위해서는 합당한 인센티브가 매우 중요하다”며 “세금 인하 등 실효성 있는 혜택이 제공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인공지능(AI) 분야에 대해서는 미국 투자가 유리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한국과 미국이 함께 활동하여 시너지를 창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짚으며 “AI와 에너지 분야에서 한미일 3국 간 협력 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전임 바이든 정부에서 시행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칩스법)에 따라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이 폐지될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최 회장은 “방미 기간 만난 미국 정계 인사가 약속된 보조금은 계속 집행될 것이라고 밝혔다”며 “미국이 실리를 고려해 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트럼프 행정부가 오는 4월쯤 보조금 정책을 다시 검토해 발표할 예정이므로 지켜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韓 산업부 ‘긴밀한 경제 관계’ 강조
정부도 상호관세 등 관세 조치에서 한국이 제외될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IRA와 칩스법 보조금 등 대미 투자 기업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미국에 피력 중이다. 이달 17∼20일에는 박종원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가 직접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 상무부, 무역대표부(USTR) 등 정부 관계자와 의회 및 싱크탱크 전문가를 면담해 이 같은 한국의 입장을 공식 전달하기도 했다.
산업부에 의하면 박 차관보는 백악관, 상무부, USTRA 등에 한미 양국 간 긴밀한 경제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한국 기업이 대규모 대미 투자로 고용 창출 등 미국 경제에 대해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 의회 주요 인사들을 면담한 자리에서도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를 기반으로 한미 공급망 연계가 가속화 한 만큼 IRA 및 반도체법 보조금 등 한국 기업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 환경을 지속적으로 조성해 달라고 당부했다는 설명이다.
박 차관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양국 간 거의 모든 품목에 대한 관세가 이미 철폐된 만큼 한국이 상호관세와 철강·알루미늄 등 제반 관세 조치에 포함되지 않도록 요청했다”면서 “아울러 조만간 양국 간 고위급 협의를 통해 주요 현안과 협력 확대 방안을 논의하자고 제의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