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CJ·삼양·오뚜기 신공장 모두 해외에
“한국 시장, 성장 잠재력 사라져”
유턴 기업 국내 재정착 비율 낮아

국내를 벗어나 해외에 생산시설을 구축하는 소비재 기업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끝없는 내수 침체와 저출산 등으로 국내 시장이 위축되자, 해외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여기에 최근에는 핀테크 등 스타트업 사이에서도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는 기업 지원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지만, 국내 복귀 기업에 대한 혜택 등 기존 지원책의 실효성마저 담보되지 않아 떠나는 발걸음을 붙잡기엔 역부족인 모습이다.
“인건비·물류비 절감, 현지화 측면에서도 유리”
24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최대 식품 제조업체 CJ제일제당은 헝가리에 1,000억원을 투자해 ‘비비고’ 만두 공장을 짓기 위해 최근 공장 설계에 들어갔다. 해당 신공장은 축구장 16개 크기의 부지(11만5,000㎡)에 최첨단 자동화 생산라인을 갖추고 2026년 하반기부터 가동에 나설 예정이다. CJ제일제당은 헝가리 신공장을 거점으로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등 인근 국가로 진출해 유럽 사업을 대형화하는 전략을 펼친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여타 식품 제조업체들도 앞다퉈 해외 생산 시설 구축에 나섰다. 전 세계에 ‘불닭 열풍’을 몰고 온 삼양식품은 2027년까지 중국 저장성에 첫 번째 해외 생산기지를 완공할 계획이며, 오뚜기와 SPC는 각각 미국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 공장을 건설한다. 롯데웰푸드도 인도 제과공장 증설을 위해 최근 국내 제빵공장을 매각했다. 한국에 들어서는 공장은 오리온이 충북 진천군에 건설 중인 생산·포장·물류 통합센터가 유일하다.
미래 성장을 위해 해외 진출을 서두르는 것은 비단 식품 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국내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도 미국과 중국 등에 증설을 추진 중이다. 이들은 해외에 공장을 짓는 이유로 인건비와 물류비, 현지화 측면 등에서 유리하다는 점을 꼽는다. 아울러 시장 상황에 맞게 물량 등을 적시에 조절할 수 있다는 점 또한 특징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국내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해 전국 소매판매액은 전년 대비 2.2% 줄어들며 ‘신용카드 대란’이 불거진 2003년(-3.2%) 후 21년 만의 최대 감소 폭을 그렸다. 백화점, 대형마트, 슈퍼마켓, 재래시장 등의 판매 금액을 조사해 지수화한 소매판매액은 대표적인 소비 지표로 불린다.
지난해 해외에서 돌아온 국내 복귀(유턴) 기업이 20곳에 불과했다는 점도 국내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사라졌다는 해석에 힘을 싣는다. ‘리쇼어링’으로 불리는 기업 복귀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 매년 평균 300곳 이상의 자국 기업을 불러들인 미국, 해마다 600여 기업이 돌아오고 있는 일본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재계는 한국과 경쟁국의 기업 투자 여건이 천양지차라고 입을 모은다. 한번 고용하면 사실상 해고가 불가능한 노동법과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 산업재해 발생 시 경영자가 형사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중대재해처벌법 등 이중 삼중의 규제가 기업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다. 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조사에서 해외 진출 기업의 95%는 “국내 유턴 의향이 없다”고 답하기도 했다.

성장 위해선 경직된 규제 탈피해야
스타트업 사이에서도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고 기존 한국 법인은 지사로 전환하는 경영 방식인 플립(Flip)이 대세로 떠올랐다. 일례로 서울 테헤란로에 사무실을 운영하던 핀테크 스타트업 A사는 본사를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전했다. 국가 간 결제에 사용되는 온라인 전자결제대행(PG) 서비스 스트라이프(Stripe)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A사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전자금융거래법 규제로 스트라이프를 이용할 수 없다”며 “기존 사업을 지속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만, 사세 확장을 위해 해외로 본사를 이전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핀테크 스타트업 B사는 싱가포르로 본사 이전을 추진 중이다. B사의 주력 사업 모델은 디지털 자산 및 토큰 발행으로, 가상자산공개(ICO) 등 관련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싱가포르로 본사를 옮겨 성장에 속도를 낸다는 구상이다. 해당 업체 외에도 열매컴퍼니, 서울옥션블루, 펀블, 바이셀스탠다드, 차지인, 원컵프로 등 다수의 국내 조각투자 및 토큰증권발행(STO) 기업이 연내 해외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다.
대기업 가운데선 현대자동차그룹이 한국 탈출 행렬에 이름을 올렸다. 2023년 기준 현대차는 전체 생산량 399만 대 가운데 204만 대를 해외 공장에서 만들었다. 같은 기간 기아도 289만 대 중 128만 대를 해외에서 생산했다. 현대차와 기아의 해외 생산 비중은 각각 51.2%, 55.6%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현대차그룹은 미국에만 약 30조원을 추가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노동계에서 “몇십만 개의 일자리가 보장된 도시 하나가 미국으로 빠져나갔다”는 우려가 짙어지는 배경이다.
정부·국회는 ‘한국판 IRA’ 법안 추진
정부와 국회가 ‘한국판 인플레이션 방지법(IRA·보조금 직접환급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핵심 소비재와 유망 스타트업에 이어 수출의 축인 자동차까지 줄줄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국내 산업 생태계가 회복 불능의 수준으로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국판 IRA가 시행되면 배터리 업계의 탈한국 행렬을 늦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관측이다.
그간 국내 전기차와 배터리 분야는 정부 보조금 규모가 미국이나 중국 등 경쟁국보다 훨씬 작은 데다, 그나마도 흑자를 낸 이듬해 법인세에서 깎아주는 방식인 탓에 적자기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미국은 배터리 공장 투자액의 30%를 보조금으로 지급하고, 킬로와트시(㎾h)당 45달러의 생산보조금을 준다. 중국도 30% 투자보조금에 더해 토지·금융 혜택을 제공한다.
이에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성민 국민의힘 의원 등 여야 의원 15명이 소속된 ‘국회 이차전지 포럼’은 배터리 공동화를 막기 위해 공장 투자금에 대해 직접적인 환급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조만간 관련 법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또한 관련 제도 도입을 위해 연구용역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내로 발길을 돌린 기업들이 실적 반등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KOTRA에 따르면 2018년 8월부터 2023년 7월까지 국내로 돌아온 유턴기업 107개 중 공장을 재가동한 기업은 27.1%(29개)에 그쳤다. 국내 복귀기업에 대한 금융, 세제지원 등 정부의 유턴 지원책에 기대 발걸음을 돌렸지만, 지원 조건이 까다롭고 최저임금 급상승, 강성노조 리스크 등 각종 부정적 요인까지 겹치면서 경영환경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게 이들 유턴 기업의 일관된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