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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반발에 암초 부딪힌 국내 데이터센터 시장 전자파 피해 등 허위 정보로 공포 심리 확산 정부, '전자파 신호등' 설치 등 인식 개선 방안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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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인공지능(AI) 업계가 핵심 인프라로 꼽히는 데이터센터 확보에 차질을 빚고 있다. 데이터센터 설립 부지 인근 지역 주민들이 전자파 피해 등 근거가 부족한 낭설에 휩쓸려 반기를 든 결과다. 일파만파 확산하는 님비(NIMBY, 공공의 이익에는 부합하지만 자신이 속한 지역에는 이롭지 아니한 일을 반대하는 행동) 현상으로 인해 시장 곳곳에서 데이터센터 착공 지연·건설 무산 사례가 누적되는 가운데, 정부는 시민 인식 개선을 위해 각종 대응책을 마련하고 나섰다.
데이터센터 건립 지연 사례 속출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에서는 데이터센터 건립이 지연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부동산 서비스 업체 세빌스코리아에 따르면 작년 상반기 기준 수도권에서 데이터센터 용도로 인허가를 받은 총 33건 사업 중 절반 이상인 17곳이 사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거나 지연됐다. 인허가를 받은 사업 중 35%가 1년 이상 착공하지 못했고, 공사를 진행 중인 사업 중 약 30%는 인허가 후 착공까지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됐다. 과거 4년간 개발된 데이터센터들이 인허가 후 평균 4~5개월 내 착공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느린 수준이다.
국내 데이터센터 건립에 제동이 걸린 배경에는 주민 반발이 있다. 일례로 마그나PFV㈜가 추진하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덕이동 데이터센터 사업의 경우, 2023년 3월 건축 허가를 받았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착공이 크게 지연됐다. 고양시 역시 지난해 8월 말 착공 신고서를 최종 반려하며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착공 지연에 따른 비용이 급격히 늘자 시공사인 GS건설은 행정심판을 제기했고, 지난해 10월 경기도행정심판위원회가 고양시의 착공신고서 반려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뒤에야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의 반대로 인해 아예 데이터센터 건설이 무산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앞서 네이버는 2019년 용인시에 데이터센터 ‘각 용인’을 지으려고 했으나, 해당 계획은 일부 주민과 지역 정치권 반발로 무산됐다. 네이버는 이후 건립지를 변경해 ‘각 세종’을 세종시에 준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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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파 나온다" 주민 인식 악화
데이터센터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 소음, 백연 현상 등으로 주민 건강이 악화된다는 ‘괴담’에 휘둘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업계 관계자는 "해외 데이터센터 건립 시에는 주민들이 전력·냉각수 과다 사용 등과 관련한 불만을 주로 표출하는데, 국내에서는 유독 특고압 선로로 인해 발생하는 전자파 관련 우려가 많다"며 "아무리 업체 측에서 해명을 해도 여론이 쉽게 바뀌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해당 관계자는 "전력 시설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극저주파로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데, 주민들 사이에서 과도한 공포 심리가 확산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데이터센터는 철저히 밀폐된 방어 시설로 구축돼 있다"며 "설령 주거 단지 등이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해도, 실제 측정 시에는 전자파가 거의 검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래전파공학연구소가 실시한 전자파 인체 노출량에 대한 측정 평가에 따르면, 데이터센터를 둘러싼 16개 지점에서 전자파 강도가 가장 높은 특정 지점의 반경 2m내 전력 설비 전자파(ELF) 노출량은 최대 14mG(밀리가우스)로 나타났다. 이는 정부가 인체 보호 기준으로 삼는 국제비이온화방호선위원회(ICNIRP) 기준인 883mG의 1.5%에 불과한 수치이자, 전기밥솥보다 낮은 수준이다. 전기장(V/m) 측정값 역시 0.35 V/m으로 인체 보호 기준값(4,166 V/m) 대비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
정부 차원의 대처는?
정부는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장기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 인터넷진흥과 과장은 지난해 11월 개최된 '스마트엔터프라이즈 2024' 세미나에서 데이터센터 부지 인근에 전자파 신호등의 시범 설치를 계획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자파 신호등은 말 그대로 전자파 강도 측정 결과를 LED 전광판에 청색, 황색, 적색으로 표시해 전자파 발생 상황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설비다. 현재 이동통신사 기지국 근처에 주로 설치돼 있다.
장 과장은 "전자파 신호등 설치를 데이터센터 업자들은 다소 꺼리지만, 지역 상생 모델 구축 차원에서 전자파가 전혀 유해하지 않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며 "최근 국회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지적이 따른 만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과기정통부는 전자파 신호등 설치 외에도 전문가가 참여하는 지자체 협력 토론회, 컨퍼런스 등을 통해 지자체 및 지역민과의 소통을 강화, 데이터센터 관련 인식 개선에 힘쓰겠다는 방침이다.
이처럼 정부가 직접 인식 개선에 착수한 배경에는 글로벌 데이터센터 업계의 '코리아 패싱(한국 배제)' 현상이 있다. 최근 전 세계 각지에서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지만, 한국은 이 같은 투자 열기에서 소외된 상태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다수의 빅테크 기업이 한국에서 데이터센터를 확보하겠다는 입장이었는데, 상황이 변했다”며 “강력한 규제 및 데이터센터 지방 분산 정책, 지역 님비 등이 시장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