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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 압박으로 시장 불안정성 확대
‘정치 불확실성→자본이탈’ 시나리오 재현
중국, 위안화 경제권 전략적 확대 움직임

국제 결제에 위안화를 사용하려는 기업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는 금융 시장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따라 급등락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발표된 것으로, 달러 자산에 대한 신뢰도 저하와 맞물리면서 국제 결제 시스템의 재편을 앞당길 전망이다. 이러한 흐름 속 중국은 달러 대신 위안화로 결제하는 ‘소규모 화폐전환권역’을 형성한다는 전략 아래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금리 압박 수위 높이는 트럼프, 시장은 ‘휘청’
22일 중국인민대학 국제통화연구소(IMI)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국제 결제에 달러 등을 사용 중인 기업 가운데 24%가 향후 위안화 사용을 검토할 예정인 것으로 파악됐다. 향후 국제 결제에 위안화를 사용할 계획이 있다는 기업의 비율은 지난해 2분기 21.5%에서 같은 해 4분기 23%로 늘었고, 올해까지 꾸준히 증가 추세다. 또 전체 조사 대상 기업의 약 68%는 이미 국제 무역 결제에 위안화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53%의 기업은 외환 거래에 위안화를 사용 중이라고 답했다.
위안화 국제 결제 사용이 어려운 이유로는 40% 이상 기업이 ‘무역 상대국의 위안화 사용 거부 반응’을 꼽았다. 이 외에도 태환 문제, 자본 통제, 외부 영향에 대한 위안화의 취약성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투융홍 IMI 부소장은 “현재의 글로벌 금융 시장 상황을 고려했을 때 통화 시스템이 더욱 다각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며 “이는 중국 통화의 해외 사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 부소장의 말처럼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은 ‘트럼프 발(發) 충격’에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연준·Fed)를 향한 금리 압박 발언을 이어가면서다. 21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물가가 꾸준히 하락하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너무 늦은 사람이자, 중대 패배자(major loser)인 그가 금리를 지금 당장 낮추지 않으면, 경제는 둔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겨냥한 발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직후 시장은 요동쳤다. 이날 뉴욕 증시에서 다우 지수는 2.48% 하락했으며, S&P500과 나스닥도 각각 2.36%, 2.55% 급락했다. 이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 1932년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주가가 내려갔다”고 꼬집기도 했다. 외환시장에서는 달러화 가치가 급락했고, 장기 국채 금리는 수요 감소에 가파르게 치솟았다. 금 가격 역시 또다시 신기록을 새로 썼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정치 리스크가 자산 가치 자체를 흔드는 변수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에 금리 인하를 촉구할수록 시장에서는 통화 정책의 독립성에 대한 의문이 짙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달러 자산의 안전성 약화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로 인한 글로벌 투자 환경 악화까지 예고되면서 달러 패권의 위기 또한 심화하고 있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돈은 소문보다 먼저 움직인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초고액 자산가들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늘었다. 미국 부유층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 강화, 연준 압박, 경기둔화 전망이 맞물리자 앞다퉈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특히 스위스는 이번에도 조용한 자산 대피처로서 위상을 되찾고 있다. 스위스 현지 금융사들에 따르면 미국 고객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계좌 개설과 자금 이체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이 같은 자산 이탈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정치 리스크에 대한 방어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나 정책 변화가 예고 없이 자산 시장에 충격을 주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통제받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자산을 피신시키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응이라는 게 자산가들의 일관된 견해다.
또 하나는 세금 회피 목적이다.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에서 세금 또한 자유롭지 않은 만큼 조세회피처를 찾는 수요 또한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 시민권자의 경우 해외금융계좌신고법에 따라 해외 계좌 개설 등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많은 자산가가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단 전언이다. 스위스 금융 자문업체 알펜파트너스의 창립자 피에르 가브리스는 “적지 않은 자산가가 유럽 내 거주지나 제2시민권을 찾고 있다”면서 “차선책으로 부동산 매입을 검토하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대규모 자산 이동은 단순히 현금 자산 회피에 그치는 게 아니라 미국 금융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 저하로도 풀이할 수 있다. 연준이 정치적 압박에 흔들릴 가능성을 시장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많은 시장 참여자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적 리스크’를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달러의 위상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달러 자산이 불안정하다는 인식이 커질수록 외환보유나 글로벌 투자 차원에서 달러 채택률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위안화 크로스보더 거래 확대, 동남아 공략 주효
국제 결제 시스템에서 위안화가 조용한 약진을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중국 인민은행에 의하면 올해 1분기 중국과 캄보디아·말레이시아 간 크로스보더 결제액은 전년 대비 45% 급증했다. 이는 단순한 무역 확대를 넘어 결제 통화로서 위안화 채택이 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신호라는 게 인민은행의 진단이다.
한국 또한 위안화 결제 비중을 조금씩 높이고 있다. 한국은행의 조사에서 지난해 우리나라 교역의 1.5%는 위안화로 이뤄졌다. 특히 수입에서 위안화 결제 비중은 6년 연속 상승한 3.1%로 전년 대비 0.7%p 늘었다. 이는 위안화로 이뤄지는 반도체 수입이 전년 대비 20배 폭증한 데 따른 결과로, 전체 위안화 결제 수입은 1년 사이 27.9% 늘었다. 2022년 82.8%를 기록한 달러화 결제 수입이 지난해 80.3%로 감소한 것과 대조적이다.
중국은 이러한 흐름을 타고 시진핑 국가 주석의 아세안 순방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과 위안화 기반 금융 협력을 강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 주석은 이달 14일부터 베트남, 말레이시아, 캄보디아를 차례로 방문해 다자 무역 확대와 금융 협력을 강조했다. 이 같은 행보는 최근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와 대중 견제 강화에 대응해 역내 경제 협력을 심화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행보로 풀이된다. 특히 위안화 결제 확대는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 통화 영향력을 높이려는 중국의 장기 전략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