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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개발 원조 확대’로 위상 강화 서구 및 중국 공백 ‘빠르게 메워’ 전략적 셈법 “한가득”
본 기사는 VoxEU–CEPR(경제정책연구센터)의 칼럼을 The Economy 편집팀이 재작성한 것입니다. 원문 분석을 참조해 해석과 논평을 추가했으며 본 기사에 제시된 견해는 VoxEU 및 CEPR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서구권 국가들이 기존의 개발 원조 역할을 포기하고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Belt and Road Initiative, BRI, 이하 일대일로)가 흔들리면서 일본이 인도태평양에서 힘의 균형을 다시 맞추고 있다.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고 자선 성격이 강하다고 알려져 온 일본의 원조는 이제 강력한 대외 정책 수단으로 변모했다.

일본, ‘공적 원조’ 통해 지정학적 영향력 확대
일본의 개발 협력은 이제 경제적 차원을 넘어 지정학적 영향력의 확대로 진화했다. 결정적 계기는 2023년 개정된 ‘개발협력헌장’(Development Cooperation Charter)에서 원조를 ‘인도태평양의 자유와 개방성’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규정하면서다. 작년 일본의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ODA) 규모는 170억 달러(약 23조8천억원)를 넘어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했는데 이중 절반 가까이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배정됐다.
앞으로 계획은 더 원대하다. 2030년까지 인도태평양을 1순위 지역으로 750억 달러(약 105조원)를 공공-민간 부문 기반 시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원조를 단순한 선의가 아닌 전략적 무기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서구 및 중국 공백, ‘일본이 메워’
반면 중국은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떠오르는 중국의 상징이었던 일대일로는 프로젝트의 파산을 막기 위한 긴급 구제로 출혈이 지속되며 힘을 잃었다. 2008~2021년 기간 중국은 기투자 프로젝트를 지원하는데 2천4백억 달러(약 335조원)를 소진해 신규 투자 여력이 별로 없다.

주: 중국(짙은 청색), 일본(청색)
일본의 위상은 미국과 유럽이 물러난 자리를 채우면서 강화됐다. 미국 정부는 해외 원조를 줄이라는 정치적 압박에 밀려 국제개발청(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 예산을 상당 부분 삭감해야 할 상황이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국방 예산에 점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어 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원 규모가 10년 만에 최저인 30억 달러(약 4조2천억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둘을 합치면 동남아시아 원조 예산이 적어도 연간 50억 달러(약 7조원)는 사라진 셈이고 일본이 이 공백의 1/3 정도를 책임지고 있다.

주: 미국,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좌측부터), 공적개발원조 금액(십억 달러)(짙은 청색), OECD 개발원조위원회 전체 원조 규모 중 비중(%)(청색)
전략적 목표와 긴밀히 연계
그렇다면 일본의 약진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먼저 원조 실행까지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일본 국제협력기구(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JICA)를 통한 승인 기간이 과거 24개월에서 지금은 14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 라오스, 파키스탄 등과 채무 구조조정 이후 속도가 느려지고 불투명한 조건들이 넘쳐나는 중국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일본의 원조는 전략적 목표와 연관돼 있다. 2023년 개정 헌장은 공적개발원조와 해양 법치주의(maritime rule of law)를 연결 지어 일본의 해안 방어 시스템 및 사이버 보안 지원을 개발 원조 항목에 포함했다. 이로써 원조 대상국은 군비 증강 의혹을 받지 않으면서 자국 안보 역량을 효과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 중국이 사용 목적이 애매한 민군 겸용(dual-use) 프로젝트로 의심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아시아 개발 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및 다른 원조국들과 공동 자금 조달을 확대하고 있다. 소규모의 자금으로 십억 달러 규모의 개발 원조가 가능한 승수 효과(multiplier effect)가 생긴다. 이에 반해 일대일 협상을 선호하는 중국은 다자간 협력을 통해 키울 수 있는 신뢰성과 규모를 모두 놓치고 있다.
‘중일 경쟁’으로 ‘피원조국 협상력’도 강화
물론 일본도 인구 감소와 낮은 경제 성장률로 원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낮은 국내 금리를 활용해 1% 이하의 저금리 대출이 가능하고 상환금을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원조 모델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반면 중국은 거시경제 상황도 일본보다 훨씬 심각하다. 내수는 쪼그라들었고 미국의 관세가 수출을 깎아 먹고 있으며 세수도 줄어들었다. 당연히 일대일로를 가능하게 했던 저금리 자금도 바닥나고 있다. 돈은 마르는 데 긴급 구제는 늘어나니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도 여력이 별로 없다.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과거의 수동적인 피원조국에서 적극적인 전략적 파트너로 입장이 바뀌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중국의 지원으로 시작한 고속철도 프로젝트에 일본을 끌어들여 경쟁 환경을 조성했고, 필리핀은 국방 프로젝트에 일본, 수자원 관리에는 중국의 투자를 받았다. 베트남은 일본의 경비함 지원을 경제개발 원조 항목에 포함하기도 했다. 모두 협력 관계 다각화와 영향력 유지라는 명확한 전략을 보여준다.
이렇게 중국의 영향력이 줄고 일본의 역할이 커지며 인도태평양은 개발 원조에 있어 구매자 우위 시장(buyer’s market)으로 변했다. 각국 정부가 적정 부채 기준 및 공개 입찰 요건 등의 기준만 명확히 제시한다면 중일 양국의 지정학적 경쟁을 자국 이익에 활용할 여지가 커진다. 사상 처음으로 인도태평양 국가들이 객체에서 주체로 변모할 기회가 온 셈이다.
원문의 저자는 시가 히로아키(Hiroaki Shiga) 요코하마 국립대학교(Yokohama National University) 교수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Japan’s soft power gains a hard edge | EAST ASIA FORUM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