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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 절벽에 생존 적신호 VC 수두룩
투자 심리 위축, 민간 투자 감소세 뚜렷
모태펀드 종료설에 힘 실리며 위기 심화

벤처캐피탈협회(VC협회)가 회비를 내지 못한 회원사들을 제명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의 모태펀드 축소와 고금리 시대의 투자 기피가 겹치면서 벤처투자 업계의 생존 위기 또한 심화하는 모습이다. 이번 사태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한국 벤처 투자 시스템이 예산 의존형이었음을 보여주는 구조적 붕괴 신호로 해석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체납 회비 감면’ 회유책에도 활동 중단 의사
8일 업계에 따르면 VC협회는 지난달 말 SJ벤처인베스트먼트(SJ벤처), 솔본인베스트먼트, 아시아창업투자 등 3곳의 VC를 회원사 명단에서 제명했다. VC협회는 앞서 올해 초 이사회에서 이들 VC 회원사 제명 안건을 의결, 총회를 거쳐 최종 제명 결론에 도달했다. VC협회는 VC 산업과 관련된 제도 및 경영환경 개선을 목표로 VC들이 모여 설립한 사단법인으로, 1989년 설립 이래 직접 회원사를 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상 초유의 제명 조치 원인은 회비 체납이다. VC협회 규정에서는 “2년 이상 회비를 체납한 회원에 대해 총회 의결을 거쳐 제명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들 VC는 이보다 훨씬 긴 기간 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솔본인베스트먼트의 경우, 지난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 넘게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SJ벤처는 2020년 2분기부터 지난해 4분기까지 총 57개월간 회비를 체납했다. 체납 금액만 2,200만원에 달한다. VC협회는 추후 협회비 납부를 확약하면 체납 회비 전액을 감면해주는 회유책을 펼쳤지만, SJ벤처는 협회 활동을 하지 않겠단 의사를 밝히며 제명이 확정됐다. 이는 여타 2곳의 VC도 마찬가지다.
SJ벤처의 모태는 1999년 설립된 나래벤처투자다. 스탠더드텔레콤과 닉소텔레콤 등이 발기주주로 참여해 자본금 100억원을 출자했고, 이후 지식과창조벤처투자, 이노피온벤처캐피탈인베스트먼트로 간판을 바꿔 단 데 이어 2017년부터는 현재 사명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의사 출신 자산가 김병건 회장이 78.9%의 지분율로 최대 주주에 올라서는 등 자금 융통에 물꼬가 트일 것이란 기대도 있었지만, 실적 개선은 요원한 상황이다.
경영 악화의 배경으로는 오랫동안 신규 펀드를 결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현재 SJ벤처가 운용 중인 펀드는 2018년 결성한 29억원 규모의 프로젝트펀드가 유일하다. VC의 주요 수익원인 관리보수 유입이 원활히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23년말 기준 SJ벤처의 누적 결손금 규모는 200억원에 달하며, 올해 1월에는 자본잠식률을 낮추기 위해 자본금을 79억원에서 39억원으로 덜어내는 무상감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상 초유의 VC협회 회비 미납 사태는 단기적인 시장 침체나 투자 심리 위축 수준의 문제를 넘어 ‘한국식 창업 지원 구조’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VC 업계 관계자는 “이번에 제명된 곳들은 한때 수천억원을 굴리던 VC들”이라며 “이들 VC가 2,000만원 정도의 회비를 못 내는 현실이라면, 더 아래 단계의 창업 생태계는 말할 것도 없다”며 암울한 분위기를 전했다.
“고위험, 고수익” 안 통해
이 같은 VC 업계의 한파는 1987년 문을 연 1세대 VC 대성창업투자(대성창투)의 위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성창투는 지난해 한국벤처투자의 모태펀드로부터 출자를 받아 만들기로 한 600억원 규모의 콘텐츠펀드 결성을 철회한 데 이어 올해 초 한국성장금융과 함께 추진한 1,000억원 규모의 중견기업 혁신펀드 결성도 철회했다. 연이은 펀드 결성 철회로 대성창투는 한국벤처투자와 한국성장금융으로부터 각각 1년, 3년의 출자사업 참여 금지 처분을 받았다.
강도 높은 제재를 감수하면서까지 대성창투가 펀드 결성을 철회한 이유는 민간 매칭 출자자(LP)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국내 벤처펀드 민간 출자액은 8조1,324억원으로 전년 대비 25.1% 감소했다. 정책금융 공급액은 2조4,226억원으로 전년 대비 11.3% 증가했으나, 가파른 민간 출자액 감소세를 방어하기엔 역부족인 모습이다.
이에 중기부는 벤처모펀드 결성을 위한 규정을 마련하고, 기획재정부와 협력해 세제 혜택안을 마련하는 등 민간 벤처투자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 왔지만 ‘펀딩 절벽’을 극복하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설령 민간 벤처모펀드가 활성화된다 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매칭 LP 확보 문제는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고위험을 감수하는 만큼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LP를 설득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마저 쉽지 않다. 높은 위험은 그대로지만, 수익은 저조하다는 게 시장 참여자들의 주된 목소리다.

시장이 아니라 예산으로 굴러 온 벤처 생태계
설상가상으로 정부가 운영해 온 모태펀드가 향후 2년 내 종료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면서 VC 업계 전반에 사실상 ‘사망 예고장’이 전달됐다는 위기감 또한 커지고 있다. 그간 벤처투자 생태계를 지탱해 온 핵심 자금줄인 모태펀드가 사라질 경우, 대다수 중소 VC는 존립 자체가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근거로 지난 2005년 결성된 정부 모태펀드는 고위험 영역인 벤처에 안정적인 자금 공급원 역할을 해 왔다. 정부가 모태가 되는 자금을 VC 펀드에 출자하고, 이후 VC들이 민간 자본을 유치해 펀드 규모를 키워 중소·벤처기업에 투자하는 형태다. 지난해 3분기 누적 기준 모태펀드 조성액은 9조8,617억원으로, VC가 실제 10만232개 중소·벤처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31조7,996억원에 달한다.
이 같은 정부 모태펀드 사업은 2035년 종료된다. 아직 10년이란 시간이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통상 벤처 펀드의 운용 기간이 8년이란 것을 고려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실질적 운용 기간을 역산하면, 2027년 이후로는 모태펀드의 신규 출자가 중단될 것이란 관측이다. 예컨대 2028년 모태펀드가 출자한 벤처 펀드는 8년차인 2036년에는 법적 존속 기간을 넘어 실제 펀드 운용이 중단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전환이 충분한 민간 자금 생태계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다는 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벤처 투자 시장은 정부의 정책자금 비율이 약 40%로 높기 때문에 그 핵심인 모태펀드가 빠진다면 국내 벤처·스타트업 투자 및 산업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간 중심의 건전한 벤처투자 시장’이라는 구호는 오래전부터 반복돼 왔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펀드가 정부 출자금 없이는 결성조차 되지 못하는 구조였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