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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회복 강조, 알뜰폰 피해엔 선 긋기
‘500만 이탈 시나리오’ 현실화 가능성↓
위약금 둘러싼 사회·정치적 비판 거세져

SK텔레콤(SKT)이 해킹 사태로 40만 명에 가까운 가입자를 잃은 것으로 파악됐다. 초반 하루 3만 명을 넘어서던 가입자 이탈 행렬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위약금과 해지 수수료가 가입자 유출의 임시 방어벽으로 작용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정치권과 여론은 위약금 면제를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으나, SKT는 이와 관련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업계 책임론엔 신중 대응, 소비자 신뢰 회복에 방점
24일 업계에 따르면 SKT 해킹 사고가 공지된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21일까지 한 달간 SKT를 이탈한 가입자는 누적 39만5,517명에 달한다. 이 기간 KT로 옮겨간 가입자는 22만709명, LG유플러스로 이동한 가입자는 17만4,808명으로 집계됐다. KT와 LG유플러스에서 SKT로 이동한 가입자도 있었지만, 그 수는 4만3,567명에 그쳤다.
SKT의 알뜰폰 자회사 SK텔링크도 지난 한 달간 약 4만4,000명의 가입자를 잃었다. 해킹 사고 발생 직전까지 하루 100명 안팎의 가입자 증가세를 그리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 같은 가입자 이탈은 SK텔링크뿐 아니라 SKT 망을 이용하는 알뜰폰 사업자들도 공통으로 겪는 문제다. 특히 SKT 망만 사용하는 신생 알뜰폰 업자들은 피해가 더욱 클 것이라는 게 업계의 주된 목소리다.
알뜰폰 업계는 이번 해킹 사고로 인해 가입자 민원이 폭증한 것과 관련해 SKT의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다. 각종 민원 처리와 유심 교체를 원하는 소비자에게 택배 등을 보내면서 발생한 비용을 SKT가 보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거론 중인 방안은 알뜰폰 사업자들이 지불한 택배비 등을 향후 망 이용대가 정산 금액에서 제하는 방법과 피해 금액을 직접 지급하는 방안 등이다.
SKT는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임봉호 SKT MNO 사업부장은 “알뜰폰 사업자는 보통 3개 통신사를 동시에 취급한다”며 “SKT 망을 사용하는 고객의 이탈이 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업자 자체 고객 이탈은 다르게 봐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는 알뜰폰 사업자를 대상으로 알뜰폰 고객의 유심 교체를 무료 지원하는 부분만 제공 중”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SKT는 소비자 신뢰 회복에 만전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SKT는 “고객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고객 여러분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를 시작하겠다”며 “고객과 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 향상 방안이 실행될 수 있도록 회사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장기적으로는 이번 사태를 전화위복 삼아 회사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최악의 사태 피했지만, 여전히 ‘잠재적 이탈층’ 존재
SKT는 해킹 사태 직후 가입자 이탈 규모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대혼란을 겪은 바 있다. 피해 사실이 알려진 초반 2주 동안 이탈한 소비자는 20만 명에 달했고, 이달 1일에는 불과 하루 사이 3만8,716명의 가입자가 다른 통신사로 옮겨 가기도 했다. 이 같은 수치는 SKT 내부적으로도 비상사태로 간주됐다. 당시 유영상 SKT 대표는 “최대 500만 명이 이탈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3년간 7조원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다행히 이후 가입자 이탈 추이는 점차 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달 15일에는 7,878명의 가입자가 이탈하며 해킹 사태 이후 처음으로 1만 명 미만을 기록했다. 토요일인 17일 9,722명으로 반짝 반등하긴 했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1만 명을 넘지 않고 있다. 이에 당초 SKT가 우려했던 500만 명 이탈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가능성 또한 낮아지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겉보기 수치에 안도할 상황은 아니라는 평가를 내놨다. 실제 이탈자 수보다 더 중요한 건 ‘잠재적 이탈층’이란 지적이다. 보안 이슈가 직접적으로 체감되지 않거나, 통신사 변경에 따른 비용과 번거로움이 고객 이탈을 일시적으로 지연키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장기 가입자나 가족 결합 할인 등을 이용하는 경우는 즉시 이탈이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다”며 “향후 SKT의 재발 방지 노력과 성과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실제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위약금과 해지 수수료라는 장벽이 존재했다는 점이 이번 가입자 수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SKT 약관상 중도 해지 시 발생하는 위약금 부담이 소비자들의 이탈 결정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진단이다. SKT가 이번 위기를 부분적으로나마 봉합할 수 있었던 데는 신뢰 회복에 대한 의지 표명 같은 회사의 노력보다는 약관상 제약이 주요한 방어벽으로 작용한 셈이다.
정치권 압박에 법적·재무적 부담 커져
이런 가운데 SKT의 위약금 면제를 둘러싼 논란도 본격화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18세 이상 성인 남녀 5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7.2%는 ‘회사의 귀책 사유가 있을 경우, 가입자가 해지를 원할 때 위약금을 면제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실제 피해가 확인된 경우만 위약금을 면제하면 된다’는 응답은 13.8%에 그쳤다. 위약금 면제가 통신 시장 내 신뢰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SKT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은 “이번 사태는 명백히 통신사의 과실”이라며 “피해를 본 소비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손해를 떠넘기는 구조는 시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강 의원은 “통신사 약관상 ‘불가항력’ 조항의 적용 범위를 재검토하고, 통신사의 보안 책임 강화와 소비자 보호 방안을 입법적으로 보완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럼에도 SKT는 위약금 면제 요구에 대해 공식 입장을 유보하고 있다. 사고 발생 이후 매일 내놓는 보도자료에서 ‘재발 방지’와 ‘신뢰 회복’을 강조하면서도, 위약금 관련 구체적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법적 책임 인정이 곧바로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풀이된다. 위약금 면제를 허용할 경우, 기존 약관 체계와 사업 수익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결국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SKT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앞으로는 신뢰 회복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구체적 조치는 내놓지 않으면서 정치적·사회적 압박 또한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의 판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리더십 공백 속 구체적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명확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SKT의 행보가 또 다른 신뢰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