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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우크라에 장거리 미사일 제한 해제 검토 美 트럼프 "푸틴에 압력 가할 다른 방안 모색" 러시아, 국방비로 성장 이어갔지만 한계 봉착

유럽 주요국과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군사·경제적 압박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확대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고 있으며,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대러시아 종전 중재에서 손을 떼고 추가 제재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그동안 국방비를 대폭 투입해 전쟁 특수를 누리며 성장해 온 러시아 경제는 인구 감소와 고급 인재 유출, 군사 중심의 케인스주의 정책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獨 "우크라, 러시아 본토 공격해 방어해야"
26일(이하 현지시각)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로파포럼 행사에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무기에 사거리 제한이 더 이상 없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자국 영토에서만 공격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스스로 충분히 방어하지 못한다”며 “우크라이나는 이제 러시아의 군사 시설을 공격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내 군사 시설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해석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독일 정부에 타우러스 미사일 공급을 3년째 요구해 왔다. 전임 올라프 숄츠 총리는 러시아를 자극할 것을 우려해 이를 거부했지만, 메르츠 총리는 동맹국과 협력이 이뤄진다면 타우러스를 공급할 뜻이 있다고 밝힌 상태다. 메르츠 총리는 이날 구체적인 무기 지원 여부는 “전략적 모호성 유지” 차원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이튿날 핀란드 방문 중 “사거리 제한은 이미 수개월 전 논의된 사안으로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다시 말했다”고 말해 공급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 같은 메르츠 총리의 발언을 두고 독일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에 타우러스를 지원할 길이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일 연방하원 국방위원장 토마스 뢰베캄프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을 통해 "숄츠 총리 시절 우크라이나가 타우러스 미사일을 제공받지 못한 이유는 이 미사일이 러시아 본토 깊숙한 곳의 목표물도 타격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그 제한이 사라졌다"며 "타우러스 공급의 결정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러, 美 중재 의지 약화 속에 우크라 공세 강화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주 러시아를 추가 제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압박이 통하지 않으면 종전협상을 포기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WSJ은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이번 제재에는 은행 부문에 대한 새로운 제재를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할 다른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전했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이 휴전 협상에 싫증을 느끼고 있어 푸틴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압박이 효과가 없을 경우 협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WSJ은 린지 그레이엄(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등 측근들이 최근 트럼프 대통령에게 푸틴 대통령은 협상 타결을 원하지 않으며 그를 진지한 협상에 임하게 하려면 압박밖에는 답이 없다고 설득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26일 푸틴 대통령이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격한 표현을 쓰며 대러 추가 제재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 중재에서 발을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무기고가 계속 줄어드는 가운데 미국이 휴전을 위한 외교에서 발을 빼려 하는 상황을 러시아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새로운 군사 지원안을 단 한 건도 승인하지 않았고, 미 의회에서 승인한 지원 예산 38억5,000만 달러(약 5조3,000억원)의 사용 여부에 대한 입장도 밝히지 않고 있다.

전쟁으로 견인한 러 경제, 이제는 한계 봉착해
하지만 서방의 대러제재 강화 움직임에도 러시아가 즉각 반응하지는 않고 있다. 군사·경제 제재가 무색하게 지난해 러시아 경제가 활황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은 4.1%에 육박하고 실업률은 2.4%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 침공 후 3년이 지났지만 임금이 뛰고 소비가 늘어나 경제가 호황이다 못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해 3월 러시아 주가지수인 RTSI는 한 달 만에 15%, 3개월 새 39%나 뛰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가 리야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을 한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 3월 13일에는 하루에만 지수가 10% 급등했다.
러시아 경제가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도 이렇게 높은 성장률을 유지하는 배경으로는 군사적 케인스주의가 꼽힌다. '케인스주의'란 정부가 공공지출을 늘려 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경기를 부양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나치 독일이 꼽힌다. 당시 대대적인 군사력 확장에 나서면서 1933~1937년 독일 경제는 55% 성장했다. 이같은 현상이 러시아에서도 벌어졌다.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쏟아부으면서 방산기업이 24시간 3교대로 돌아갔고 전쟁으로 일할 사람 구하기 어려워진 무기 공장들이 월급 인상을 주도하면서 전반적인 급여 수준이 크게 올랐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러시아 경제를 떠받쳐온 군사적 케인즈주의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케인스주의는 경제에 여유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정책인데 러시아의 가용 자원이 동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바닥난 건 인적 자원이다. 러시아는 전쟁 이전에도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나라였다. 그동안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자들로 메워왔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에서 대탈출이 벌어졌다. 특히 IT나 금융 분야 고숙련 인재들까지, 무려 75만명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여기에 매달 1만~3만명의 청년이 군에 입대하면서 인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견인한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단기적으로는 국방비 지출 확대와 군수 산업 활성화를 통해 일정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지만, 이는 경제의 근본적 체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그동안 러시아에서는 교육·과학기술·보건 등 미래 생산성을 높이는 분야의 투자가 대폭 축소되고, 대신 전차·무기 생산과 병력 수송 같은 생산성이 낮은 부문에 자원이 집중돼 왔다. 여기에 고급 인재 유출과 인구 감소까지 겹치며, 러시아 경제는 이미 지속 가능한 성장 궤도를 크게 이탈했다는 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