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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 내재화+산업 구조 고도화 방점
제조업 대전환 이끈 美 IRA 성과 뚜렷
추격자 벗어난 중국, 어엿한 경쟁자로

중국이 제조업의 전자동화 전략을 통해 기술굴기 두 번째 라운드에 돌입했다. 지난 10년간 추진해 온 ‘중국제조 2025’가 상당 부분 현실화한 가운데, 후속 단계로는 자동화 기반 산업 고도화를 추진하는 모습이다. 이는 생산 효율화를 뛰어넘어 자국 기술 생태계를 내수로 연결해 수출 의존을 줄이고, 대외 압박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기술굴기 실전판 돌입
28일(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2015년 발표 후 만 10년이 된 ‘중국제조(中國制造) 2025’의 후속 버전을 준비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여론을 고려해 이와 비슷한 명칭을 사용할 가능성을 낮지만, 향후 10년간 전개될 새 경제 전략 역시 반도체와 신에너지 소재 등 첨단 기술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데 우선순위를 둘 것이란 전언이다.
2015년 5월 발표된 중국제조 2025 계획은 중국의 산업 경쟁력을 전방위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발표 당시만 해도 중국이 미국 등 주요국을 위협할 첨단 분야 제조업 강국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주된 시각이었지만, 중국은 적어도 7개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을 배출했다. 미국 테슬라를 제치고 전기차 판매량 1위를 차지한 비야디(BYD), 세계 시장 내 80%가 넘는 점유율을 자랑하는 드론 기업 다좡이노베이션스(DJI)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차기 청사진 역시 중국제조 2025의 뼈대를 계승할 전망이다. 자국 국내총생산(GDP)의 약 25%를 지탱하는 제조업이 국가 안보와 일자리 창출의 핵심이라는 게 중국 지도부의 인식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지난 19일 허난성 뤄양에 있는 뤄양베어링그룹 공장을 방문해 “우리는 제조업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자립과 자강의 원칙으로 핵심기술을 완벽히 터득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갈수록 강도를 높이는 미국의 기술 규제에 맞설 대응책으로는 ‘IT 제조업 업그레이드 실행계획’을 제시했다. 중국 산업정보기술부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국가데이터관리국이 27일 발표한 해당 계획은 오는 2027년까지 IT 제조업체의 85% 이상이 주요 프로세스에서 컴퓨터 수치 제어(CNC)를 사용하도록 하고, 최소 100개의 전문 서비스 제공업체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CNC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기계 가공을 자동화하는 방식으로 제조업 자동화 수준을 크게 높일 수 있는 핵심 기술로 꼽힌다.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로봇공학, 고성능 컴퓨팅 칩 등 전략적 부문도 이번 계획에 포함됐다. 전략적 요충지와 같은 이들 분야에서 외국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고정밀 지능형 제조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게 중국 당국의 구상이다. 나아가 스마트 센싱을 비롯한 신기술의 융합을 촉진하고, 웨어러블 기기와 서비스 로봇의 배치도 적극 장려할 방침이다.

중국판 IRA, 국가 차원 보조+수요 창출
전 세계 제조업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상징적 사례로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를 꼽을 수 있다. IRA의 핵심은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투입해 기업의 생산기지를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기술 개발과 고용을 동시에 유도하는 구조다.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의 기업들은 이를 따라잡기 위해 중장기 전략을 수정해야 했고, 실제로 다수의 기업이 미국에 생산 거점을 마련하면서 기술과 생산, 일자리가 맞물린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조성됐다. 지금까지 이 모델은 사실상 미국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중국이 내놓은 제조업 자동화 플랜 또한 미국의 IRA와 유사한 구조다. 단기적으로는 산업 고도화,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쟁력 제고를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정부가 기술 기업과 제조업체 간 수요·공급을 인위적으로 설계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자동화 설비나 AI 제조 플랫폼 등 기업들에 대규모 정부 발주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시장을 조기 창출함으로써 기술 기업의 수익성을 보장한다. 이는 정부의 전략적 개입을 통한 ‘내수 시장화’ 전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같은 전략은 산업 보호를 넘어 ‘산업 증폭’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제조업 현장에 기술 수요를 만들고, 이 기술이 다시 다른 제조 현장에 적용되는 순환 구조를 통해 일종의 기술 내수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란 설명이다. 이는 전통적인 수출 중심 모델에서 탈피해 기술력 확보와 경제 안정성 모두를 동시에 꾀하려는 시도로, 외부의 수요 충격이나 제재 등 위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중국판 IRA 전략은 향후 글로벌 산업 정책에서도 일종의 기준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미국이 IRA로 패권을 공고히 한 것처럼 중국도 자국 내 완결형 구조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에서 새로운 포지션을 구축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한국처럼 정책 일관성이 다소 떨어지는 시장에서는 중앙 집중형 시스템 아래 꾸준한 시장 기회를 보장하는 중국식 산업 육성 모델이 더욱 매력적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등 핵심 분야 中 기술 속도 가속
중국의 기술 굴기 2라운드를 더 이상 ‘후발 주자의 분투’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은 이제 선두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추격자이자, 일부 분야에선 이미 동등한 경쟁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오랜 시간 한국의 수출 효자 종목으로 기능해 온 반도체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국가반도체산업 투자펀드가 출자한 창신메모리(CXMT)는 DDR5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사양 제품 개발 성공을 알리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정면 겨냥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생산 수율과 안정성, 전력 효율 등의 측면에서 중국이 뒤처진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막대한 연구개발(R&D) 투자와 정부 차원의 보조금은 이 격차를 메울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다. 과거와 같은 ‘기술 따라잡기’를 넘어 특정 분야에 자원을 몰아넣는 전략적 집중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위협은 매우 실질적이라는 게 업계의 일관된 평가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 위기와 정책 불확실성 속에서 생산 거점 이동, R&D 방향 조정 등 각종 변수에 시달리고 있다. 이에 산업 생태계와 정책, 시장 연계 전략을 아우르는 종합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온다. 유회준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는 “중국의 기술 굴기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기술 개발뿐 아니라 공급망 안정성, 내수기반 확대, 정부의 선제적 투자 유도까지 전방위 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진단하며 “한국이 기술 선도국의 자리를 지키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계산법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