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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연락 체계, 성별에 따라 책임 분배 왜곡 반복된 호출, 여성의 경력에 구조적 부담 설계 변경만으로도 육아 균형 가능
본 기사는 VoxEU–CEPR(경제정책연구센터)의 칼럼을 The Economy 편집팀이 재작성한 것입니다. 원문 분석을 참조해 해석과 논평을 추가했으며 본 기사에 제시된 견해는 VoxEU 및 CEPR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학교는 누구에게 먼저 연락할까.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놀라울 만큼 일관됐다. 아버지가 연락 가능하다고 명시해도, 학교는 여전히 어머니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이 관행은 단순한 행정 편의가 아니라, 가정 내 역할과 노동시장 참여 구조를 고착화하는 조용한 메커니즘이다

성 역할을 고정시키는 시스템의 기본값
2025년,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와 하버드대 연구진은 미국의 공립학교 교장 8만여 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실험을 진행했다. 가상의 부모가 학교에 보낸 이메일은 연락처 두 개를 함께 제시하며 둘 중 누구에게 연락할지를 학교에 맡겼다. 연락 가능 여부가 명시되지 않은 조건에서도, 학교는 60% 확률로 어머니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연락 가능하다’라고 명시한 경우에도 어머니에게 간 비율은 26%에 달했다. 반대로 어머니가 가능하다고 했을 땐, 90%가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 구조와 문화적 습관이 반복되며 굳어진 결과다.

주: 부모 가용성 유형(X축), 전화 응답 비율(%)(Y축)/아빠 여유, 엄마 바쁨, 정보 없음, 아빠 바쁨, 엄마 여유(좌측부터)
반복되는 구조적 선택
학생 정보 시스템은 부모에게 연락처 순위를 기재하게 한다. 많은 가정이 관행적으로 어머니를 1순위에 올리고, 시스템은 이를 기본값으로 삼아 호출한다. 이 작은 설계가 육아 책임을 실질적으로 고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학교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녀 관련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전제 아래 행동한다. 이런 기대는 반복될수록 실제 구조로 굳어진다. 정보의 중심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는 점차 주변화된다.
‘신뢰’가 만드는 부담
일각에서는 학교가 어머니를 먼저 찾는 관행을 어머니에 대한 신뢰로 해석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호출은 결국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로 이어진다. 병원에 연락하고, 간호사 메모를 확인하고, 아이를 데려오고, 다시 집중을 되찾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5분으로 추산된다. 이를 5,000만 명의 공립학교 학생 규모로 환산하면 연간 약 4,000만 시간이 소모된다. 이는 풀타임 일자리 2만 개에 해당하는 노동력이다.
이러한 중단은 경력 누적에 불이익을 준다. 경제학자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은 반복되는 업무 단절이 임금 상승과 승진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여성은 점차 단절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직무로 몰리게 되고, 이는 성별 임금 격차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진다.
육아로 인한 경력 조정
2023년, 미국 부모 35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자녀 돌봄이 경력 선택과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었다. 어머니 응답자들은 아버지에 비해 ‘유연한 근무’, ‘짧은 출퇴근 거리’, ‘낮은 급여’와 같은 조건의 직장을 더 자주 선택했다고 답했다. 이는 육아 책임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아버지들도 육아로 인해 일시적 집중력 저하를 경험한다고 응답했지만, 진로 방향 자체를 바꾸는 경우는 드물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는 일시적 영향에 그치지만, 어머니의 경력에는 구조적인 흔적을 남긴다.

주: 응답 항목(X축), 동의 응답(Y축)/유연 근무, 짧은 출퇴근, 전업 선택, 낮은 임금, 집중 저하, 경력 제한, 승진 불이익, 관계 갈등, 건강 악화, 근무 태도 변화, 전공 선택 영향(좌측부터)
능력 아닌 기회의 문제
아버지가 양육에 덜 적합하다는 인식은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케냐, 노르웨이, 미국 등에서 진행된 연구는 아버지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면 자녀의 발달 지표에서 어머니와 차이가 없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2024년 메타 분석에 따르면, 육아에 투입된 시간이 같을 때 아버지도 어머니만큼 효과적인 양육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사회는 어머니가 더 잘할 것이라는 기대를 유지한다. 이는 단순한 성별 고정관념을 넘어, 육아의 효율성조차 어머니에게 있다고 가정하는 ‘성과 중심’ 판단이다. 반복되는 호출은 이러한 기대를 더욱 강화한다.
정보 격차의 시작
학교 연락처는 출산 직후 작성된다. 미국에서 어머니는 평균 12주의 육아휴직을 보장받지만,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짧거나 없는 경우가 많다. 초기부터 어머니가 병원 예약, 수면 루틴, 연락망 구축 등을 맡게 되고, 정보 격차가 벌어진다. 학교는 더 잘 아는 쪽에 연락하게 되고, 어머니는 반복적으로 호출되며 중심 역할을 고정하게 된다. 이 구조는 노동시장에서도 반복된다. 기업은 어머니를 ‘중단 가능성 높은 인력’으로 판단하고, 유연한 업무로 배치한다. 여성은 이를 인식하고 스스로 진로를 조정하게 된다.
제도가 만든 차이
스웨덴은 아버지에게 의무적으로 육아휴직을 할당하는 ‘아빠 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제도 덕분에 육아휴직에서 아버지의 비율은 45%에 이른다. 이처럼 제도가 뒷받침되면, 유치원 연락 시스템도 부모 모두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긴급 연락도 동시에 전송된다. 리투아니아,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 역시 유사한 추세다.
반면, 영국은 아버지에게 단 2주간의 육아휴직만 보장한다. 그 결과 학교 연락의 3분의 2가 어머니에게 집중되는 구조는 미국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런 차이는 문화가 아니라 정책의 차이다
바뀌어야 할 시작점
지금의 학생 정보 시스템은 부모 중 한 명만을 주 연락처로 설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부모 모두를 ‘공동 연락처’로 등록하고, 이름을 삭제하려면 별도로 조정하도록 설계하면 구조는 달라질 수 있다. 자동 연락 시스템도 호출 순서를 번갈아 가며 배정하도록 바꿀 수 있다. 일부 주에서는 학교가 양쪽 부모에게 모두 연락을 시도했는지를 기록하도록 지침을 마련하고 있다. 기업들도 교대 알림 시스템을 도입해 아버지의 병원 동행과 픽업 참여를 실질적으로 늘리고 있다. 연락 구조를 바꾸면 가족의 역할 분담도 자연스럽게 조정된다.
설계가 바꾸는 구조
지금의 호출 시스템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낡은 관행과 시스템 설계에서 비롯된 결과다. 하지만 이는 바뀔 수 있다. 육아의 부담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은, 단순히 가정 내 역할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과 사회 구조 전체를 바꿀 수 있다. 변화는 복잡하지 않다. 학교 행정실에서 어떤 번호를 먼저 눌러야 할지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사회가 아버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가장 단순하고도 분명한 신호다.
원문의 저자는 크리스티 버자드(Kristy Buzard) 시러큐스대학교(Syracuse University) 교수 외 2명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Default to mum: How institutions quietly shape gender roles in parenting | CEPR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