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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테크] 수출 착시의 함정, 기술 주도권 지키려면 기준을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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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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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주제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분석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전달에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수정

수출 통계가 초래한 경쟁력 왜곡
불균형한 지식재산 구조가 만든 기술 종속 위험
특허·무형자산 기반의 산업 분석과 협상 기준 마련 필요

본 기사는 VoxEU–CEPR(경제정책연구센터)의 칼럼을 The Economy 편집팀이 재작성한 것입니다. 원문 분석을 참조해 해석과 논평을 추가했으며 본 기사에 제시된 견해는 VoxEU 및 CEPR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2023년 유럽연합(EU)은 첨단기술 제품을 4,610억 유로(약 691조5천억원)어치 수출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무역흑자와 별개로, 여전히 170억 유로(약 25조5천억원)에 달하는 첨단기술 분야 무역적자가 남아 있다. 수출 실적만 보면 유럽은 기술 강국처럼 보이지만, 특허 출원, 벤처 투자, 무형자산 지출 등 기술 경쟁력의 핵심 지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EU는 세계 최첨단 발명의 5분의 1만 창출하고 있으며, 지식 창출 투자 규모도 미국의 3분의 2 수준에 그친다. 그럼에도 유럽은 여전히 '수출이 많으면 경쟁력이 있다는' 식의 단순 지표, 즉 현시비교우위지수(Revealed Comparative Advantage,RCA)에 의존해 산업 경쟁력을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왜곡된 판단을 낳을 수 있다. 지금처럼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앞둔 상황에서는 특히 위험하다. 기술 기반 산업 질서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ChatGPT

수출 실적은 과거의 그림자다

2024년 기준, EU는 미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1,980억 유로(약 297조원) 흑자를 기록했고, 역외 수출 중 18%가 첨단기술 제품일 정도로 겉보기에선 성과가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수출은 본질적으로 후행 지표다. 공급망이 작동하고 환율이 유리하게 움직이거나, 다국적 기업 내부에서 가격을 조정해 발생한 거래도 모두 수출로 잡힌다. 겉으로 드러난 수치만으로는 산업의 실질 경쟁력을 알기 어렵다. 국제무역 전문가 벤 셰퍼드(Ben Shepherd)는 RCA가 1포인트 오를 때 최대 40%는 경쟁국의 철수나 환율 변화 때문이지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유럽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분석도 유사하다. CEPR은 RCA와 특허 보유력을 120개 산업군에 걸쳐 비교했는데, 유럽이 비교우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 분야의 절반은 실제론 기술적 우위가 없었다. 수출은 그 제품이 어디서 떠나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지만, 왜 존재하는지, 기술의 핵심이 누구 손에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수출 많은 나라가 기술 강국일까

RCA는 특정 제품의 수출 비중이 전 세계 평균보다 높으면 경쟁력이 있다고 간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지표는 제품의 기술 수준이나 지식재산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독일에서 MRI 장비가 수출됐다 해도, 소프트웨어는 미국, 핵심 부품은 일본에서 개발됐을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기준 유럽의 첨단기술 수출 중 29%는 EU 외부 특허나 소프트웨어가 포함돼 있었다. 10년 전엔 18%였다. 수출 실적으로는 기술 자립도를 판단할 수 없다.

관세 창구가 아닌 특허청을 들여다보면 현실이 더 분명해진다. 2023년 기준, 미국·EU·일본에 동시에 등록된 '삼극특허'를 기준으로 보면 EU의 점유율은 22%였다. 미국은 31%, 중국은 27%로 유럽을 앞질렀다. 10년 전만 해도 유럽과 미국은 비슷했지만, 이제는 격차가 뚜렷해졌다.

2012~2023년 지역별 삼극특허 점유율 변화(단위: %)
주: 연도(X축), 3자 특허 점유율(Y축)/미국(진한 파랑), 유럽연합(중간 파랑), 중국(연한 파랑)

연구개발 투자도 마찬가지다. 유럽통계청(Eurostat)에 따르면 2023년 EU의 R&D 투자 비율은 GDP의 2.22%로, 최근 5년간 정체돼 있다. 같은 해 미국은 3.4%를 기록했다. 무형 자산 투자에서도 유럽은 뒤처진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스웨덴·프랑스·미국 같은 지식집약국은 GDP의 16% 이상을 무형 자산에 투자하지만, EU의 중간값은 11%에 불과하다. 무형 자산은 단순한 연구비를 넘어 플랫폼, 생태계, 브랜드 가치로 이어지는 만큼, 지금의 1%포인트 차이는 미래 생산성에서 훨씬 큰 격차로 돌아올 수 있다.

복잡성으로 보는 진짜 경쟁력

복잡계 경제학(Complexity economics)은 단순한 수출 규모가 아니라, 어떤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역량에 주목한다. 하버드 성장연구소의 경제 복잡성 지수(Economic Complexity Index, ECI)에 따르면, 한국, 일본, 스위스는 유럽 평균보다 높은 기술 복잡도를 갖고 있다. 유럽 내부에서도 차이는 뚜렷하다. 독일은 세계 4위 수준이지만, 스페인, 폴란드, 그리스는 세계 평균을 밑돈다. 이 지표는 다양한 산업에서 정교한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단일 산업 의존도가 높을수록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관세, 놓치는 기술

EU는 현재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청정 기술, 디지털 서비스, 의료기기 분야에서 7월 말까지 관세 인하 협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하지만 단순한 세금보다 더 중요한 쟁점이 있다. 2018년 이후 유럽 기업들이 미국에서 부과받은 공정거래 벌금은 67억 유로(약 10조500억원)에 이르며, 사실상 비공식 관세 역할을 해왔다. EU는 미국 시장 접근을 위해 이를 양보할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규제 비용이 여전히 높은 상황에서, 수출 실적만을 근거로 한 협상은 자칫 기술 주도권을 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의 수출 통계는 조립 단계 매출까지 포함돼 실적이 과장돼 있다. 부품만 수출하고 조립은 동아시아에서 해도 전체 금액이 유럽 수출로 잡힌다. 이런 구조에서 관세를 낮추면, 소프트웨어와 특허를 가진 미국 기업이 실질적인 이익과 기술 주도권을 가져가게 된다.

RCA 착시에 빠졌던 나라들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칠레와 모로코도 RCA를 맹신한 결과 손실을 보았다. 칠레는 2006년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 당시, 가공 목재와 종이 부문에서 2.1의 높은 RCA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보였지만, 중국 기업들이 더 나은 기술로 시장을 장악했고, 칠레의 생산량은 14% 줄었다. 모로코도 섬유 산업에서 RCA를 근거로 2004년 미국과 협정을 맺었지만, 쿼터가 사라지자, 미국 상품들은 더 저렴한 아시아로 발주를 돌렸고, 모로코의 대미 의류 수출은 34% 급감했다. 기술력과 학습 곡선을 고려하지 않은 대가는 컸다.

지표가 바뀌면 협상 전략도 달라진다

기존 RCA 지수를 보완하려면 산업의 기술력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대안은 특허 가중 RCA다. 수출 점유율에 해당 산업의 국내 특허 비중을 곱해 기술 기반을 수치에 반영하는 방식이다. 2024년 데이터를 적용하면, 유럽이 비교우위를 가졌다고 평가했던 배터리 양극재의 RCA는 0.43에서 -0.27로, 정밀 광학 분야의 RCA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 지표는 총요소생산성과의 상관계수도 기존 0.55에서 0.84로 끌어올린다. 즉, 기술력을 훨씬 더 정확히 반영한다는 의미다.

2023년 유럽연합의 주요 첨단기술 산업별 RCA vs 특허가중 RCA
주: 산업부문(X축), 비교우위 지수(Y축)/배터리 양극재, 정밀 광학, 반도체 장비, AI기반 의료기기, 광전자기술, 농업 바이오투입물(좌측부터), RCA(진한 파랑), 특허가중 RCA(연한 파랑)

여기에 기술 파이프라인까지 결합하면, 지표는 단순한 평가표를 넘어 협상 전략이 된다. 예컨대 유럽 기업이 차세대 반도체 관련 글로벌 특허를 15건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해당 산업에 대한 관세 인하는 공동 연구나 기술 공유를 조건으로 설정할 수 있다. EU는 이미 '2025 경쟁력 나침반'이라는 이름으로 창업과 스케일업 데이터를 수집 중이다. 여기에 실시간 특허 데이터를 결합하면 활용도는 더욱 높아진다.

관세보다 중요한 건 왜 수출하느냐

EU는 지금까지 전략적 자율성을 관세 조정과 공급망 다변화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기술 기반 산업의 힘은 설계와 표준, 생태계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온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이나 중국의 산업 보조금 정책을 유럽이 그대로 따라갈 수는 없다. 하지만 특허를 보유하고 기술을 설계하는 기업에 유리한 시장을 만들 수는 있다. 이를 위해선 공공조달에서 특허 보유에 가점을 주거나, 첨단 기술 인재에 신속 비자를 제공하는 등 직접적인 정책 수단이 필요하다. WTO의 비차별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특허의 국적은 시민권이 아니라 성능이기 때문이다. EU 연구기금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도 시제품보단 산업 클러스터 전체를 육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한다.

진짜 거울을 볼 시간이다

지금 유럽의 수출 실적은 여전히 화려해 보이지만, 기술 경쟁력의 실체를 보여주진 않는다. 과거 산업 구조에 기반한 단순 지표에 의존해서는 미래 전략을 설계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수치를 넘어선 분석과,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근거 있는 투자와 정책이다. 무역 협상에서도 수출 실적이 아니라 기술 기반을 중심에 두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것이 유럽이 경쟁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다.

원문의 저자는 필리포 디 마우로(Filippo Di Mauro) 할레 경제연구소(Halle Institute For Economic Research) 연구원 외 2명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Export strength does not equal tech strength: Rethinking EU comparative advantage | CEPR에 게재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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