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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시동 걸린 애경산업 매각 "참전할 줄 알았는데" 줄줄이 발 뺀 SI들 인수 후보들, K-뷰티 성장 가능성에 주목

애경산업 매각을 위한 적격 예비인수후보(쇼트리스트)가 공개됐다. 태광그룹, 앵커에쿼티파트너스(PE) 등을 중심으로 애경산업 인수전의 대략적인 윤곽이 잡힌 것이다. 인수 후보자들은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애경산업 화장품 사업의 미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애경산업, 쇼트리스트 선정 완료
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애경산업의 매각 주관사인 삼정KPMG는 최근 태광그룹과 홍콩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앵커PE 등 4곳을 쇼트리스트로 선정해 통보했다. 태광그룹의 경우 산하의 티투프라이빗에쿼티가 유안타인베스트먼트와 공동 운용사를 결성해 재무적 투자자(FI)로 나서고, 태광그룹 계열사가 뒤에서 전략적 투자자(SI)로서 힘을 보태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서는 태광그룹이 뷰티·생활용품 기업인 애경산업 인수전에 뛰어든 것은 의외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태광산업의 기존 사업 구조가 석유화학과 금융 중심이기 때문이다. 태광산업이 이처럼 이례적인 모험을 감행한 것은 최근 들어 석유화학 업황이 악화하며 신사업 확장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앞서 태광산업은 화장품·에너지·부동산 개발 관련 기업 인수와 설립을 위해 올해와 내년에 걸쳐 1조5,000억원가량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필요 자금은 지난달 27일 이사회에서 자사주 전량(27만1,769주, 지분율 24.41%)을 담보로 3,186억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해 마련했다.
그간 인수합병(M&A) 참여가 뜸했던 앵커PE도 쇼트리스트에 올라 주목을 받고 있다. 앵커PE는 2021년 16억 달러(약 2조원)를 투입해 결성한 4호 블라인드 펀드의 투자 기간 종료에 맞춰 신규 딜 확보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현재 이 펀드의 미소진 자금(드라이파우더)은 1조원가량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 폴캐피탈코리아, 라이온코퍼레이션 등도 쇼트리스트에 포함됐다. 삼정KPMG는 선정된 후보자들에게 약 두 달간 상세 실사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 올해 3분기 내 본입찰을 실시하고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뒤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하는 것이 목표다.
유력 후보군들의 인수전 이탈
한편 유력 인수 후보군으로 꼽혔던 호반그룹, 동국제약 등 SI는 쇼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앞서 시장에서는 창업주인 김상열 호반그룹 회장의 장녀 김윤혜 호반프라퍼티 사장이 애경산업 인수를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확산한 바 있다. 호반 측이 애경산업 인수를 통해 다수의 화장품 및 생활용품 브랜드를 확보, 유통 사업 경쟁력을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건설업체로 출발한 호반그룹은 최근 수년간 전선·음식료·유통·숙박·서비스 등 비건설 업종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해 왔다.
동국제약 역시 애경산업이 매물로 나온 이후부터 매수를 위한 내부 검토에 착수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동국제약은 마데카 크림으로 잘 알려진 더마코스메틱 브랜드 ‘센텔리안24’를 론칭하는 등 일반의약품(OTC) 기반의 생활용품 브랜드 확장에 힘을 쏟아 왔다. 최근에는 ODM(제조사개발생산) 업체 리봄화장품, 뷰티 디바이스 업체 위드닉스 등을 연이어 인수하며 종합 헬스케어 기업으로의 전환도 꾀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직접판매 방식으로 해외 매출을 확대 중인 애터미, 면도기·주방용품 전문 기업 도루코, 과거 애경산업 인수를 검토했던 동원그룹 등도 인수 후보군으로 거론됐으나, 모두 실제 인수전에서는 발을 뺐다.

애경산업이 품은 가능성
이들이 인수전에서 이탈한 원인으로는 부진한 실적이 지목된다. 당초 애경산업은 전체 매출에서 화장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 흥행이 어려울 것이란 평가를 받았다. 중국 시장에서의 판매 부진으로 인해 실적 성장세가 꺾였다는 사실도 시장 여론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 애경산업의 화장품 부문 매출 중 70%가 수출에서 발생하며, 이 중 80% 이상이 중국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처럼 중국 내 한국 화장품 점유율이 하락하는 시기에는 실적이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실제 올해 1분기 기준 애경산업의 전체 매출에서 화장품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로 지난해 1분기(37%)보다 줄었다.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459억원, 1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 88.4% 감소했다.
이 같은 실적 둔화 흐름에도 불구하고 태경그룹, 앵커PE 등 굵직한 후보들이 인수 의향을 거두지 않은 것은 한국 미용 산업의 성장 가능성 때문이다. 소위 'K-뷰티'라고도 불리는 한국 미용 산업은 화장품을 중심축 삼아 글로벌 시장에서 뚜렷이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다. 한국의 2024년 기준 연간 화장품 수출액은 102억 달러(약 14조원)로 전년 대비 20.6% 성장했다. 이는 세계 화장품 수출국 중 네 번째로 높은 수치다. 반도체, 자동차에 이어 화장품이 한국의 3대 수출 품목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관계자는 "애경산업은 이미 자체 화장품 생산 설비와 브랜드 운영 경험을 갖추고 있는 기업"이라며 "적절한 전략을 짜 K-뷰티 성장세에 편승한다면 얼마든지 재기를 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