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시 금융 위기" 李 대통령 강경 발언, 평행선 달리는 韓·美
입력
수정
李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에 3,500억 달러 투자하긴 어려워" 통화 스와프 개설 요구한 韓, 美 수용 가능성은 사실상 낮아 좁혀지지 않는 이견, 韓도 인도처럼 고율 관세 부과받나

이재명 대통령이 관세 협상 과정에서 제시된 3,500억 달러(약 487조8,300억원) 규모 대미 투자 방안과 관련해 재차 난색을 표했다. 통화 스와프 등 안전장치 없이 해당 방안을 현실화하면 1997년 닥쳤던 '금융 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우리나라 정부는 최근 미국에 통화 스와프 개설 등을 요구했으나, 미국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할 것으로 보인다.
韓 정부, 대규모 대미 투자 '난색'
21일(이하 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지난 19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투자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아직 한미 간 무역 합의 내용을 문서화하지 못했다"고 발언했다. 한국과 미국은 지난 7월 구두 합의를 통해 미국이 한국에 부과한 관세율을 낮추는 대신, 한국이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등의 조치를 이행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해 왔다.
이 대통령은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대로 3,500억 달러를 전액 현금으로 미국에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 위기 때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울러 미국과의 무역 합의를 문서화한 일본의 외환 보유액 규모 등을 설명하며 한국은 일본과 상황이 다르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상업적 합리성을 보장하는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현재의 핵심 과제로, 이는 가장 큰 걸림돌로 남아있기도 하다"며 "실무급 협의에서의 제안들은 상업적 타당성을 보장하지 못해 양국 간 이견을 메우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협상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우리는 이 불안정한 상황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야 한다"고 답했다.
맹점은 '통화 스와프'?
이 대통령이 언급했듯, 우리나라는 대규모 대미 투자를 위해 통화 스와프 개설이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고수 중이다. 한미가 합의한 3,500억 달러는 우리나라 외화 보유액(4,163억 달러)의 84%에 달하는 규모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9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미국의 요구대로라면) 3,500억 달러를 외환 시장에서 조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1년에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은 200억~300억 달러를 넘기 어렵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 시장에서 원화를 대거 투입해 달러를 조달할 경우,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치솟으며 외환 시장이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면 이 같은 부담을 대폭 경감하는 것이 가능하다. 통화 스와프는 유사시 자국 화폐를 상대국에 맡기고 미리 정해진 환율로 상대국 통화를 빌려오는 일종의 ‘국가 간 마이너스 통장’이다. 한미간 통화 스와프가 개설되면 한국은 원화를 발행해 달러로 전환한 후 펀드를 조성하거나, 외환 보유액을 쓰더라도 원·달러 통화 스와프를 통해 외환 부족 사태를 사전 차단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정부는 이달 미국 측에 무제한 한미 통화 스와프 개설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미국이 한국의 통화 스와프 개설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현재 미국과 상설 통화 스와프를 체결한 국가는 일본, 유로존(유로화 사용국), 스위스, 영국, 캐나다 등 대부분이 기축통화를 보유한 나라들이다. 통화 스와프 체결 조건 자체가 상당히 엄격하다는 의미다. 이에 더해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면 결국 미국이 차관을 내주고, 그 자금으로 한국이 다시 대미 투자를 진행하는 기형적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고율 관세 부과받은 인도의 선택
양국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한국이 인도처럼 고율 관세를 부과받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과 인도는 지난 4월 미국이 인도에 상호관세 26%를 부과한 뒤 5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비판하며 상호관세를 1%P 낮춘 25%로 조정하고, 보복성 관세 25%를 더해 총 50%의 관세를 인도산 제품에 부과하고 나섰다.
미국의 고율 관세로 무역 시장에 상당한 충격이 발생한 가운데,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연일 ‘스와데시(자국산) 소비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지난 21일 연설에서도 “우리 일상용품 상당수가 외국산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구체적인 국가명 등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사실상 미국의 극단적인 관세 조치를 겨냥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 발언 직후 인도 현지에서는 맥도날드, 펩시, 애플 등 미국계 브랜드의 불매 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인도와 중국·러시아의 협력 관계도 미국의 관세 부과를 기점으로 강화되는 추세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와 외교적 압박을 발판 삼아 우호 관계를 구축한 상태다. 양국은 최근 2020년 국경 충돌 당시의 악감정을 뒤로 하고 국경 분쟁 해결 노력을 배가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은 비료와 희토류 공급을 약속하며 무역 장벽 완화 조치에 나섰고, 인도는 오랜 기간 금지해 온 중국 관광객 비자 발급을 재개했다. 직항편 운항도 곧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