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배 비자 장사’ 팔 걷어붙인 트럼프, 피해는 결국 미국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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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만원 H-1B 수수료 1.4억원으로 美 기업들, 연 20조원 떠안을 판 미국인 일자리 및 혁신 경쟁력에 악영향

미국 기업들이 해외 숙련 노동자를 유치하는 데 쓰는 H-1B 비자의 수수료를 트럼프 행정부가 100배 인상하기로 하면서 미국 산업계 전반에 충격파가 가해지고 있다. 기술, 금융, 의료 등 핵심 분야에서 이민자 인력이 중추적 역할을 해온 만큼, 이번 조치는 예비 이민자뿐 아니라 미국 경제 자체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중국과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이번 조치로 오히려 뒤처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기업들이 수수료 부담을 피하기 위해 미국 내 프로젝트 대신 해외에 연구소를 세우거나 거점 일부를 해외로 옮기면 미국의 첨단 기술 생태계도 장기적으로 손해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외국인이 미국인 일자리 위협”
21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함께 H-1B 비자 수수료를 현 1,000달러(약 140만원)의 100배인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로 올리는 내용의 포고문에 서명했다. 새 수수료 규정은 9월 21일 0시 1분부터 발효된다. 통상 H-1B 비자 발급 비용은 기업들이 부담하는데, 이를 대폭 인상해 내국인 고용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백악관은 사실관계 설명 자료 배포를 통해 “H-1B 프로그램은 미래의 미국인 노동자들이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직업을 선택할 동기 부여를 저해하며, 이는 우리의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이 프로그램의 악용을 해결하고 임금 하락을 막으며 국가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H-1B 프로그램을 이용하려는 회사들에 더 높은 비용을 부과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발표 하루 만인 21일 소셜미디어(SNS) X(옛 트위터)를 통해 “이건 연간 수수료가 아니다. 신규 비자 신청자에게만 적용되는 일회성 수수료(one-time fee)”라며 “현재 H-1B 비자를 보유하고 해외에 체류 중인 사람은 미국 재입국 시에도 10만 달러를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전날 러트닉 장관이 새 수수료가 연간 수수료라고 밝힌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20일 러트닝 장관은 기자들에게 “매년 10만 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번 말하며 ‘연간’ 수수료임을 강조한 바 있다. 이에 대해 AP통신은 익명을 요구한 백악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현재 (비자를) 갱신할 때는 적용되지 않으나, 다만 해당 정책에 대해선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기술 초격차 통로 제 손으로 막은 꼴
백악관이 한발 물러선 것은 정책 발표 직후 미국 내에서 이민자 출신 고급 기술 인력에 의존해 온 테크기업과 금융계를 중심으로 큰 혼란이 빚어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MS), JP모건, 아마존, 골드만삭스 등 일부 기업들은 새 규정 발표 직후 내부 이메일을 통해 전문직 비자 소지 직원들에게 미국에 머물 것을 권고했다. 재입국 거부를 피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머무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골자로, 해외에 거주 중인 이들에게는 이틀 내에 돌아오라고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국(USCIS) 통계에서 지난해 신규 발급된 H-1B 비자는 14만1,000건에 달했다. FT는 내년에도 발급 규모가 비슷하다면, 미 고용주들은 건당 10만 달러(약 1억4,000만원), 총 140억 달러(약 20조원)를 부담하게 될 것으로 추산했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세계적 인재를 유치해 왔던 미국의 글로벌 경쟁력에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도 줄을 잇고 있다. 미국 기술기업 연합체 '챔버 오브 프로그레스(Chamber of Progress)'의 애덤 코바체비치 대표는 21일 뉴욕타임스(NYT)에 "이번 결정이 미국의 인공지능(AI) 분야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중국과의 AI 전쟁에서 한 손이 등 뒤에 묶인 채 싸우는 것과 같다. AI 분야의 최고 인재는 한정돼 있으며 그중 일부는 외국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H-1B 비자가 가장 많이 발급된 국가는 인도와 중국으로, 지난해의 경우 약 83%(인도 70%·중국 13%)가 인도·중국 출신에게 발급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미국이 고급 기술자 및 전문 인재 확보에서 두 나라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 이민국 자료를 보면, H-1B 의존도가 높은 기업은 아마존(1만44명), 타타컨설턴시(5,505명), MS(5,189명), 메타(5,123명), 애플(4,202명), 구글(4,181명) 순으로 집계됐다. 미 정부 발표 이후 빅테크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은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전문가들은 또 건전한 정책 환경이라면 H-1B 비자 발급 확대가 오히려 미국 경제와 고용에 순이익을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더 많은 외국인 고숙련 인력이 미국에서 일하고 정착할수록, 내국인과의 협업 효과가 누적돼 새로운 산업 기회와 일자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보호무역과 규제 강화에 기운 경제 민족주의 기조 속에서 H-1B 비자는 더 좁아지고, 비용 장벽은 높아지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와 달리, 이번 조치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설적으로 미국인 근로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도 나온다.

기업의 해외 이전 가속화 우려도
반대로 캐나다, 유럽 등은 반사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의 신규 외국 인재 유입이 줄어들면 자연히 캐나다나 중국 등 다른 국가로 유입될 것이라는 분석에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1일 캐나다 기업 협의회 회장인 골디 하이더는 “캐나다가 절실히 필요한 숙련된 인력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며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토론토에 본사를 둔 디지털 자산 그룹 나인포인트 파트너스의 전무이사인 알렉스 탭스콧도 “미국의 비자 변경이 캐나다가 글로벌 인재들이 선호하는 목적지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미국의 손실이 캐나다의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 기술 기업들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가 잠재적으로 유럽에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프랑스 테크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기업) 기업 미라클(Mirakl)의 공동 창업자이자 공동 최고경영자(CEO)인 아드리앙 누센바움은 “우리는 H-1B 비자 수수료 폭등을 무엇보다 유럽 기술계에 엄청난 기회로 본다”며 “유럽을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에게 더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 글로벌 인재를 채용하는 우리의 능력을 강화하고 혁신과 경쟁력의 허브로서 대륙의 위치를 공고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와 중국 역시 반사익을 톡톡히 볼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취업 경로가 사실상 차단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고비용의 비자 제도에 의존하기보다 인도와 중국 현지에서 인재를 확보하는 전략을 택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H-1B 비자는 고숙련 외국인이 미국에서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방법이다. 이런 상황에선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수수료를 내거나, 높은 수수료로 인해 미국으로 들어오지 못한 해외 고숙련 기술자를 대체할 인력을 단기간에 미국 내에서 찾거나 양성해야 하지만, 어떤 경우도 미국 기업에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미국 내 고용을 촉진하려는 정책이 도리어 기업의 미국 탈출을 가져오는 셈이다.
인도의 인재들까지 아예 중국이 흡수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중국은 그간 문제가 됐던 ‘두뇌 유출(Brain Drain)’에서 ‘두뇌 귀환(Brain Gain)’으로 돌아설 것이란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중국은 ‘천인계획(千人计划)’, ‘메이드인차이나(made in China)2025’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자국은 물론 해외 인재를 양성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기술 역량을 높이는 데 막대한 투자를 해왔으나, 타국으로의 인재 유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이번에 세운 ‘인재 장벽’은 곧 자국의 인재풀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중국 측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