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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안보보좌관 "다음 주 워싱턴서 트럼프와 회담" 우크라 종전협상 러에 기울자 발등에 불 "유럽, 그간 시간 낭비, 만회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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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미국과 러시아 주도로 전개되면서 프랑스와 영국 정상이 급히 백악관을 찾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 나섰다. 미국이 향후 유럽을 배제한 채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매듭지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대표적인 대서양 동맹국 정상들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英·佛 대통령, 서둘러 트럼프와 회담 추진
19일(이하 현지시간)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다음 주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한다고 밝혔다. 의제는 우크라이나 종전이며, 구체적인 날짜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 회담은 최근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종전을 위한 양자 고위급 협상을 진행한 직후 급하게 성사된 것으로, 협상 테이블에 전쟁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유럽까지 배제시키자 유럽 정상들이 급히 대응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앞서 유럽 정상들은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긴급 회동을 가졌다. 당시 회동에는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폴란드·스페인·네덜란드·덴마크 정상과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등이 참석했다.
회의 이후 스타머 총리는 기자들과 만나 "이번 회의는 유럽의 방위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며 "미국이 나토를 탈퇴할 가능성은 없지만 유럽 국가들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대서양 관계, 나토 동맹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서 "상당한 방위비 증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모든 참석자가 의견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우크라 종전협상 참여 요구, 유럽 방위비 증액 부각 전망
유럽의 통일된 메시지는 명확하다. 우크라이나의 지속적이고 견고한 평화를 위한 협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협상 테이블에 당사국인 우크라이나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의 문제는 유럽 전체의 안보와 직결된 만큼 유럽 역시 미·러 협상에서 목소리 내길 원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으로 '변심'한 미국에 대서양 동맹의 취약성을 체감하게 된 유럽 정상들은 미국 없는 안보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강론에도 그 어느 때보다 공감했다. 이를 위해 국방비 지출을 늘리고 안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도 뜻을 모았다.
다만 평화유지군 구성 문제에 대해선 균열을 노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억지력을 유지하는 병력 구성을 제안했지만 독일, 폴란드, 스페인, 이탈리아는 반대 입장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회의 후 평화유지군 관련 질의에 "매우 부적절하다"며 "완전히 시기상조"라고 일축했다. 이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주제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토론"이라며 큰 반감을 표했다. 투스크 총리도 "폴란드 군대를 파견하는 건 상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20일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한 두 차례 파리회의를 통해 유럽의 통일된 입장이 나오긴 했으나 이 회의가 실질적인 성과를 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선언에 그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지적했다. 피가로는 유럽이 이미 많은 시간을 낭비해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미국과 '달리기 경쟁'에서 뒤처졌다고도 지적하며 "푸틴의 언어와 방식을 택한 트럼프 앞에서 이를 만회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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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유럽 패싱에 러시아 환호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와 양자 회담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자 외교를 복원하고 에너지 등의 부문에서 러시아와 경제 협력을 추진해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대가로 러시아에 유리한 협상 결과를 도출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책임이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에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유럽의 불안감을 키우는 대목이다.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유리한 협상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러시아 내부에서는 이미 푸틴 대통령의 승리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눈엣가시였던 유럽과 우크라이나가 이번 회담에서 배제되자 더 흡족해하는 모습이다. 러시아 언론들은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90분간 전화 통화를 했을 때도 러시아가 아닌 미국이 대화를 시작했다고 강조하며 극찬했다. 러시아 국영TV 진행자 드미트리 키셀요프는 "관계를 끊은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며 "트럼프가 전화를 건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당시 회담을 미·러 관계 복원의 첫 단추이자 푸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을 위한 단계로 보고 있다. 회담 대표단으로 참석한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궁 외교 담당 보좌관도 해당 회담이 미·러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 독립언론 메두자는 "크렘린궁의 전략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푸틴이 이번 회담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하고 있다"고 짚기도 했다. 종전 회담의 주체는 미국과 러시아며 다른 나라들은 '조연'일 뿐, 어떤 합의도 러시아의 조건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고 보이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유럽정책분석센터(CEPA) 소속 안드레이 솔다토프와 이리나 보로건 선임연구원도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 언론이 서방 언론을 이렇게 광범위하게 인용한 적은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조로 유명한 일간지 코메르산트조차도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전화를 다루면서 '푸틴의 승리'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