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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입성 직후 시총 하락, 뒷걸음질치는 기업들 2~3개월 사이 온탕에서 냉탕으로 분위기 반전 대형주는 상장 철회, '울며 겨자 먹기' 공모가 하향도
전 세계적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며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의 기업공개(IPO) 시장에 찬바람이 불고 있다. 이른바 ‘IPO 대어’로 꼽혔던 기업들이 일제히 기업 가치 하락에 직면하면서다. 이같은 현상은 국내 증시로도 번지며 IPO를 앞둔 기업의 셈법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일부 기업들은 IPO 계획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공모가를 낮춰 상장을 강행하는 등 달라진 시장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일장춘몽'으로 끝난 IPO 시장의 봄날
올 하반기 뉴욕증시에 상장한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 미국 마케팅 자동화 플랫폼 클라비요, 미국 식료품 배송업체 인스타카트, 독일 신발기업 버켄스탁 등은 모두 성공적으로 시장에 입성했지만, 곧바로 주가가 공모가 아래로 떨어지며 기업 가치 하락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올해 최대어로 꼽혔던 ARM은 9월 상장 당시 약 50억 달러(약 6조8,000억원)를 조달하면서 단번에 시가총액 650억 달러(약 88조4,000억원)를 넘어섰지만,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아 이를 모두 반납했다. 전날 뉴욕증시에서 ARM은 공모가(51달러)보다 낮은 49달러대로 장을 마쳤다. 주당 16달러로 약 15억 달러(약 2조500억원)를 조달한 버켄스탁은 상장과 동시에 10% 넘는 주가 하락을 기록했고, 최근에는 40달러 선을 밑돌며 투자자들의 시름을 더하고 있다.
영국 런던증시도 상황이 비슷하다. 핀테크 기업 CAB페이먼츠는 상장 3개월 만에 매출 전망을 낮게 조정했고, 불과 1주일 사이 72%의 주가 폭락을 경험했다. 이에 프랑스 소프트웨어 기업 플래니스웨어, 독일 방산기업 렌크 등 다수의 기업이 상장을 연기했으며, 유럽계 사모펀드 운용사 CVC 또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증시 상장 계획 연기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IPO 시장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유동성 악화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거듭된 금리 인상을 계기로 침체에 빠진 바 있다. 하지만 올해 상반기에는 ‘금리가 오를 대로 올랐다’는 정점 인식이 퍼지며 IPO 시장 활성화에 잠시 청신호가 들어오기도 했다. 실제로 올해 뉴욕증시에 상장한 캐주얼 레스토랑 체인 카바그룹, AI 기반 뷰티플랫폼 기업 오디티테크 등은 상장 첫날 많게는 100%까지 폭등하며 시장 회복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를 키웠다. 대니얼 버튼 모간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신디케이트 헤드는 지난 7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IPO 시장 정상화까지는 한 분기 정도 더 걸릴 수 있지만, 이는 투자자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하며 “IPO 시장을 압박하는 것은 수요가 아니라 공급”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9월 이후 상장한 기업들이 연이어 주가 하락을 거듭하면서 이같은 긍정적 전망은 빛을 잃게 됐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22년 글로벌 긴축으로 유동성이 막히면서 함께 얼어붙었던 전 세계 IPO 시장이 올해 하반기부터 회복할 것이란 전망이 잇따랐지만, 여전히 침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일부 투자자들은 연말 IPO 시장의 부분 셧다운에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리차드 트루스델 데이비스 포크 로펌 의장 역시 지금의 증시를 ‘롤러코스터’에 비유하며 “2024년 1분기까지는 대어급 상장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 흐름에 순응하는 투자자들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투자자들은 투자 방향을 기존 ‘성장’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선회하는 등 장기화한 고금리에 적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내 회계·컨설팅 법인 EY한영의 ‘2023년 IPO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올해 3분기에 성사된 글로벌 IPO는 모두 350건으로 지난해 3분기(371건)와 비교해 6% 줄었다. 총 조달 금액은 384억 달러(약 52조2,000억원)로 전년 동기(523억 달러·71조1,000억원) 대비 27%가량 감소했다. 미주 지역 IPO 수는 전년 동기 대비 8% 줄어든 36건을 기록했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195건의 IPO를 성사시키며 19% 줄어든 건수를 기록했다. 유럽·중동·인도·아프리카(EMEIA) 지역은 11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 늘었지만, 조달 금액 기준으로는 37% 감소한 92억 달러(약 12조5,000억원)를 기록했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박정익 EY한영 마켓 본부장은 “유동성 부족과 자본 비용 상승 문제를 떠안은 투자자들이 기업의 성장 속도나 잠재력, 높은 벨류에이션에 대한 관심에서 재무제표, 현금흐름, 회복탄력성 등 펀더멘털이 우수한 기업들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IPO를 준비 중인 기업은 이런 투자자들의 움직임에 따라 재무 건전성과 가치를 창출할 잠재력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3조원대 몸값 예상했던 서울보증보험, IPO 앞에서 고배
한국 IPO 시장에서도 기업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글로벌 긴축정책에 따른 고금리 지속, 이스라엘-하마스 확전 가능성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 국내 상장사들의 실적 부진 등이 맞물리면서 증시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IPO를 준비하던 기업들은 공모가를 낮춰 상장을 감행하는 방안과 IPO 자체를 무기한 연기하는 방안 사이에서 고민하게 됐다.
지난 10월 초 수요예측을 진행하며 IPO를 서두르던 서울보증보험은 같은 달 23일 상장철회를 결정했다. 당초 희망 공모가로 3만9,500~5만1,800원을 제시한 서울보증보험은 다수의 기관투자자가 희망 범위 하단을 하회하는 금액에 주문을 넣으며 수요예측에서 부진한 성적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안정적인 수익성과 배당 매력을 앞세워 3조6,000억원의 몸값을 인정받고자 했던 서울보증보험은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바이오 IPO 시장에서는 공모가를 낮춘 기업이 다수 포착됐다. 당초 제시한 희망 공모가 범위 2만9,800~3만3,500원의 하단보다 33% 내린 2만원으로 공모가를 확정한 큐로셀을 비롯해 희망 공모가 8,200~9,400원보다 한참 내린 7,000원의 공모가로 상장한 에스엘에스바이오, 8월 상장한 큐리옥스바이오시스템즈 등이 대표적이다.
시장에 남아 있는 공모주 투자자들은 투자 부담이 적으면서도 대형주에 비해 주가변동성이 커 단기간 높은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중·소형주를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10월 IPO를 위해 기관투자자 대상 수요예측을 진행한 기업 중 희망 공모가 상단을 초과한 기업은 반도체 장비 전문업체 워트, 이차전지 소재 기업 유진테크놀로지, 무선통신 필터 파운드리 기업 쏘닉스, 헬스케어 플랫폼 유투바이오, 생성형 AI 분석기업 비아이매트릭스 등 모집금액이 300억원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 기업의 수요예측 결과에서는 기관투자자의 의무보유확약 비율이 9.3%에 그치면서 단기 시세차익을 선호하는 시장 참여자들의 성향을 짙게 드러냈다. 이와 관련해 한 증권사 관계자는 “하반기 기대주로 꼽히는 에코프로머티리얼즈 수요예측이 진행 중이지만, 올해 IPO 시장이 중·소형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하며 “전체 증시 상황이 크게 좋아지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