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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조사, 노동 '압승' 보수 '최악 참패' 예상
650석 중 노동당 410석, 집권 보수당 131석
집권 14년간 쌓인 '무능 리더십'에 대판 심판
영국 조기 총선 출구조사 결과 제1야당 노동당이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됐다. 개표 결과도 비슷할 경우 제1야당 당수였던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노동당 대표가 차기 총리가 되고 14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정권 교체로 귀결된 데는 보수당 정권 기간 삶의 질이 급격히 악화했다고 여기는 민심이 자리하고 있다.
노동당 410석으로 과반 확보, 정권 교체 목전
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치러진 영국 조기 총선의 출구조사 결과 스타머 대표가 이끄는 노동당이 하원 650석 가운데 410석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했다. 다른 정당의 의석 수를 합친 것보다 170석이나 많다. 5년 전 총선에서 1935년 총선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뒀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승리로 평가된다.
리시 수낵(Rishi Sunak) 현 총리가 이끄는 집권 보수당은 131석을 차지하는 데 그치며 참패했다. 이는 1834년 창당 이후 190년 만에 최악의 성적이다. 보수당의 직전 최저 의석수는 1906년에 기록했던 156석인데, 이번 총선 결과는 이보다 25석이나 부족하다. 극우 성향의 영국개혁당은 13석을 확보해 처음으로 의회 자력 입성에 성공했으며, 중도 성향 자유민주당은 61석을 확보해 3당으로 올라섰다. 2019년 총선에서 3당이었던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10석으로 쪼그라들 것으로 예상됐고, 녹색당은 2석으로 파악됐다. 이로써 영국은 14년 만에 정권을 교체가 유력해졌다.
지방선거도 참패, 11개 시장 자리 중 보수당은 겨우 1석
이번 선거는 보수당을 이끄는 수낵 총리가 조기 총선을 깜짝 발표하면서 열렸다. 앞선 지방선거에서 보수당의 참패와 절망적인 여론조사 지지율을 만회할 승부수로 '조기 총선' 카드를 내민 것이다. 보수당은 지난 5월 2일 벌어진 지방선거에서 40여 년 만에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중대 위기를 맞았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선거에서 11개 직선 광역 단체장 중 보수당은 한 곳만 얻으며 10개를 차지한 노동당에 완패했다.
107개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473석을 잃으며 의원수가 기존 989석에서 513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는 노동당(1,140석)은 물론 자유민주당(521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보수당이 지방의회에서 제3당으로 밀려난 것은 1996년 이후 28년 만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당은 득표율에서도 역대 최저 수준(25%)으로 노동당의 34%에 크게 밀렸다. 이에 윈스턴 처칠·마거릿 대처 등 세계적 지도자를 배출하며 자유주의의 요람으로 명성을 떨치던 정당으로는 전례를 찾기 힘든 굴욕적 패배라는 평가 속에 ‘보수당 위기론’이 확산하기도 했다.
브렉시트 역효과, 과도한 포퓰리즘 정책으로 신뢰 상실
보수당의 몰락 원인으로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은 경제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약 2년간 영국 경제는 8~10%대 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전기·가스 요금이 두 배 이상 폭등했고, 먹거리 물가도 급등했다. 물가 상승률은 올 들어 3~4%대로 떨어졌지만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연 5%대 고금리 상황도 계속되면서 국민의 생활고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장바구니 민심’의 악화를 피해 가지 못한 셈이다.
보수당 정권이 완결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도 당초 기대했던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중도층 지지를 크게 잃었다. 브렉시트 이후 한국·일본·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과 독자적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글로벌 투자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이렇다 할 효과를 얻지 못했다. 또한 동유럽 이민자들이 떠난 자리는 인도·파키스탄, 아프리카 등 구(舊)식민지 출신이 채웠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민자들이 영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던 브렉시트의 당위성이 퇴색된 셈이다.
최근 보수당 정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도 '보수 정권은 도덕적이고 유능하다'는 통념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역사적으로 영국 보수당은 가장 성공적인 민주주의 정당으로 꼽힌다. 보수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민해 200년 영국 민주주의 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집권해 왔고, 그러면서도 핵심가치를 줄곧 지켜옴으로써 서구 문명의 보존에도 크게 기여했다. 로버트 필, 벤저민 디즈레일리, 윈스턴 처칠, 마가렛 대처 등이 보수당의 역사를 대변한다.
하지만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전 총리의 이른바 ‘파티 게이트’를 시작으로 보수당은 심각한 내분과 함께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 이로 인해 보수당은 브렉시트 강경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존슨 지지 세력과 수낵 총리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로 갈라지며 갈등이 표면화하기도 했다. 파티 게이트 파문으로 물러난 존슨의 뒤를 이은 리즈 트러스(Elizabeth Truss) 총리는 무리한 포퓰리즘을 내세웠다가 역풍을 맞았다. 마구잡이식 감세안을 추진함에 따라 금융시장 대혼란을 초래하며 결국 49일 만에 사퇴, 영국 역사상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보수당에 대한 실망이 더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더해 영국 역사상 첫 비(非)백인 총리로 중도층과 젊은 유권자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았던 수낵의 개인적 인기마저 급속도로 쇠퇴했다. 2022년 10월 총리 취임 직후 수낵의 지지율은 30%대 후반을 기록, 이미 20%대로 추락했던 보수당 지지율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러나 이후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현재는 당 지지율을 밑돌고 있다. △인권유린 논란 속에서도 망명 신청자를 아프리카 르완다로 보내는 정책 △2009년 이후 출생자는 담배를 사지 못하게 하는 강제 금연 정책 △과다 비용을 이유로 런던-맨체스터 간 고속철도 노선을 일부 취소한 결정 등 논란의 정책들을 밀어붙이면서 지지율 하락을 자초했다. 특히 이런 측면이 가뜩이나 인도계 총리에게 부정적이었던 보수적 백인 유권자들을 더욱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