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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 연금실물이전 서비스 시작, 기존상품 해지 않고 환승 가능
사업자 44개사 중 37개사 참여, 작년 수수료 수익만 1.4조원
독주체제 깨지나, '집토끼' 사수 은행 vs 뺏으려는 증권·보험
금융권이 400조원 규모의 ‘퇴직연금 전쟁’ 참전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기존에 투자하던 자산을 번거롭게 매도할 필요 없이 금융사를 갈아탈 수 있는 ‘퇴직연금 현물이전(실물이전)’ 제도가 이달 말 시행을 앞두고 있어서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의 과반(적립금 기준)을 차지하는 은행들은 기존 고객 지키기에, 증권사들은 공격적인 투자상품 라인업을 내세워 쟁탈에 나서려는 모습이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오늘 31일 시행
28일 정부 및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과 고용노동부는 이달 31일부터 직장인의 노후자금인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를 개시한다. 이 서비스가 시행되면 퇴직연금 가입자는 기존 운용 상품을 매도(해지)하지 않고 퇴직연금 사업자만 바꿔 갈아탈 수 있다. 기존 포트폴리오를 그대로 둔 채 회사만 옮길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퇴직연금 계좌를 다른 사업자로 이전하려면 기존 상품을 모두 팔고 그에 따른 비용과 펀드 환매 후 재매수 과정에서 금융시장 상황변화로 손실이 발생했다. 금융당국은 이 서비스가 도입되면 계약이전 시 가입자가 부담하는 손실이 최소화되고 사업자 간 서비스 기반의 건전한 경쟁이 촉진돼 수익률 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물이전 대상은 신탁계약 형태의 예금·이율보증보험(GIC)·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기타파생결합사채(DLB) 등 원리금 보장상품과 공모펀드, 상장지수펀드(ETF) 등 주요 퇴직연금 상품 대부분이 해당한다. 서비스를 개시할 예정인 퇴직연금 사업자는 전체 실물 이전 대상 44개 사업자 중 37개사로 적립금 기준 전체의 94.2%에 달한다. 단, 실물이전은 확정급여형(DB형), 확정기여형(DC형), 개인형퇴직연금(IRP) 등 같은 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 중장기적으로 DC형에서 IRP로의 실물 이전 등 이번 이전 범위에 포함되지 못한 상품에 대해서도 갈아탈 수 있도록 하는 등 추가 검토할 예정이다.
증권사들, 이전 혜택 및 상품 경쟁력 강화에 총력
매년 30조원씩 성장하고 있는 퇴직연금은 빼앗길 수 없는 ‘미래 먹거리’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은행권의 과점 체제다. 올해 3분기 말 기준으로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400조원을 돌파했다. 이 가운데 은행의 적립금이 210조2,811억원으로 전체의 과반(52.56%)을 차지한다. 증권사와 보험사의 적립금은 각각 96조5,328억원, 93조2,654억원으로 전체의 24.13%, 23.31%다.
이는 금융사들이 ‘머니무브’에 대비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현재 각 업권에서는 고객 유치를 위해 로보어드바이저나 인공지능(AI) 자문서비스 등 첨단 금융 서비스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췄다. 퇴직연금 적립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은행은 타업권에 고객을 뺏기지 않기 위한 방어전에 돌입했고, 증권사와 보험사는 높은 수익률을 내세워 고객 유치에 뛰어들었다.
먼저 증권사들은 적극적인 투자를 원하는 고객들을 겨냥한다. 은행·보험업권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90% 이상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투자되고 있는 반면, 증권사 적립금은 원리금보장형의 비중이 약 70%로 비교적 낮다. 예·적금보다는 주식 같은 실적배당형 상품을 찾는 퇴직연금 가입자가 증권사에 많다는 의미다.
증권업계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다 본격적으로 금리인하기가 시작되면서 퇴직연금 운용에서도 강점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지난해 국내외 증시가 오르면서 실적배당형 비중이 높은 증권사의 수익률이 크게 올랐다. 지난해 퇴직연금 사업자 업권별 수익률은 증권이 7.11%로 가장 높았고, 은행(4.87%), 손해보험(4.63%), 생명보험(4.37%) 순이었다.
이에 개별 증권사들은 저마다 고객 확보 방안을 내놓고 있다. 증권사 중 적립금이 가장 많은 미래에셋증권(27조3,755억원)은 AI 알고리즘이 자산배분 등을 해주는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증권사 퇴직연금 적립금 2위(16조8,082억원)인 현대차증권은 올해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영업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
은행권, 과점 체제 사수 돌입
은행들도 분주하다. 특히 다양한 투자처를 찾아 증권사를 기웃거리는 고객들을 붙잡기 위해 투자상품 라인업 강화에 주력하는 양상이다. 먼저 은행권 퇴직연금 적립금 1위인 신한은행(42조7,010억원)은 펀드 상품 수를 현재 358개에서 413개로, 상장지수펀드(ETF) 상품 수도 현재 131개에서 177개까지 늘릴 계획이다. 또한 전문 은퇴자산관리 상담을 기반으로 하는 '신한 연금라운지' 채널을 추가 오픈해 특화 서비스도 제공한다.
KB국민은행은 'KB퇴직연금 전체고객 1대1 자산관리 상담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다. 퇴직연금 가입 고객 누구나 전용 상담센터로 전화하면 'KB골든라이프 연금센터' 전문가와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다. 아울러 예금 상품을 현재 830개에서 890개로 늘렸고 ETF는 68개에서 101개로 확대할 예정이다.
하나은행도 고객들의 연금자산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대면 채널에서는 전문 컨설턴트가 직접 고객을 대면하는 '찾아가는 상담 서비스'를 운영하고 전문 대면상담 채널인 '연금 더드림 라운지'도 운영 중이다. 모바일 연금닥터 서비스와 고객의 목표 연금자산 마련을 위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안하는 AI연금투자솔루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은행들은 올해 들어 사업 다각화와 고액 자산가 고객 확보를 위해 자산관리(WM) 부문에 힘을 주고 있는데, 여기엔 퇴직연금 부문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기대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실물이전 제도가 대규모 자금 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제도 시행으로 기존보다 갈아타기가 간편해지기는 하지만, 주식·리츠·사모펀드 등 상품 특성에 따라서는 기존처럼 현금화를 해서 옮겨야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금융사마다 여러 상품을 조합해 만든 디폴트 옵션 역시 실물이전 대상이 아니다. 이달 말부터 대부분의 퇴직연금 사업자가 실물이전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일부는 전산시스템 구축 지연 등으로 서비스가 늦게 개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