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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 주주활동 중 돌연 지분 매각
한양증권 인수에도 영향 미치나
한국형 행동주의, 가치투자 본질 흐린다?
국내 유명 행동주의 펀드 KCGI가 반도체 제조업체 DB하이텍의 지분을 부당 매각해 소액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혐의로 피소됐다. 그간 국내 시장에서 소액주주와 기업 오너 일가가 갈등을 빚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행동주의 펀드와의 충돌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시장에서는 이를 계기로 행동주의 펀드의 본질을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영권 위협해 단기차익 올리는 ‘그린메일’
20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DB하이텍 소액주주연대는 “KCGI가 고의로 DB하이텍의 경영권을 위협해 단기 차익을 얻고, 이 과정에서 주주들에게 손실을 줬다”며 KCGI를 검찰에 고소하고 금융감독원에 진정서를 냈다. KCGI의 행위가 미국에서도 엄격하게 제한되는 ‘그린메일’이라는 게 소액주주연대의 주장이다. 그린메일은 투자자 등이 회사 경영권에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 프리미엄을 받고 단기차익을 얻는 행위를 의미한다.
문제가 된 부분은 KCGI의 DB하이텍 지분 매입 및 매각 과정이다. KCGI는 지난해 3월 DB하이텍의 지분 약 7.05%(313만 주)를 매입하고 경영권 참여를 선언했다. 이후 소액주주들과 손잡고 이사회 회의록·회계장부 열람신청 등 활발한 주주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불과 9개월 만인 12월 28일 경영구조 개선을 이뤄냈다며 지분 5.65%를 DB하이텍의 모회사인 DB아이앤씨에 매각했다. 해당 거래는 시간외대량매매(블록딜)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금액은 당일 종가 5만8,600원보다 12.6% 높은 6만6,000원이었다.
이 과정에서 KCGI는 막대한 차익을 실현했고, 해당 소식이 알려진 후 DB하이텍 주가는 줄곧 하락세를 보이며 19일 종가 기준 34,000원까지 내려왔다. 소액주주들의 대규모 손실을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의 경우 이같은 투자로 수익이 날 경우 해당 회사의 재무구조가 취약해지고, 제2·제3의 그린메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수익의 50%를 과세하는 등 강력한 반(反)그린메일 조항을 두고 있다.
KCGI는 DB아이앤씨 측에서 먼저 DB하이텍의 지분 매입 의사를 밝혔으며, 이에 응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KCGI 관계자는 “DB그룹 쪽에서 KCGI의 지배구조 개선안을 수용하면서 펀드가 가진 지분을 매입하겠다고 요청해 왔다”며 “단기적으로 주가에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기업의 성장성을 높이는 일이라 판단해 배당을 포기하는 대신 프리미엄을 받고 넘겼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소액주주연대는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KCGI가 DB하이텍 경영권 참여를 선언하기 이전에 DB하이텍 측과 공모해 지분을 사전 매입하고, 이후 주주총회에서 물적분할 승인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KCGI 측은 “DB하이텍의 주가가 저평가돼 있고, 경영구조 개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해 참여했을 뿐”이라고 잘라 말하며 “투명한 경영을 요구하는 행동주의 펀드에서 공모는 절대 불가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연내 예정이던 한양증권 인수는 안갯속
KCGI는 유명 애널리스트인 강성부 전 LK투자파트너스 대표가 2018년 설립한 사모펀드(PEF) 업체로, 시장 참여자들에게는 ‘강성부 펀드’라는 별칭으로 더 익숙하다. 기업 거버넌스(의사결정과정) 개선과 주주 권익을 강조한 공격적 투자가 특징이며, 국내 행동주의 펀드 중에서 매우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올해 8월에는 중소 우량 증권사인 한양증권 인수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단숨에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이번 DB하이텍 소액주주연대와의 법정 공방으로 한양증권 인수를 위한 KCGI의 움직임도 속도를 늦추게 됐다. KCGI는 지난 9월 학교법인 한양학원, 백남관광, 에이치비디씨 등과 한양증권 지분에 대한 주식매매계약(SPA)를 체결했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 29.59%를 약 2,204억원에 매입하는 내용이다. 당시 한양학원 측은 연내 매각대금 수령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KCGI의 당초 계획은 SPA 체결 직후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11월 중순에 접어든 현시점에도 KCGI는 금융당국에 심사 신청을 하지 못한 상태다. 김태원 KCGI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준비할 게 많아 단기간 내 신청은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 COO는 “꼼꼼하게 잘 준비해 (금융당국을) 납득시키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며 “연내 신청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했다.
대주주 적격성 심사는 신청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마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자료 보강 요구 등 심사 과정에 따라 심사는 연장될 수 있다. 통상 금융당국은 대주주 적격성 심사에 돌입하기 전 인수 주체 측과 물밑에서 여러 차례 교류하며 신청 시기를 가늠한다. 단기간에 신청이 힘들다는 김 COO의 발언은 당국과 조율해야 할 내용이 많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 관계자는 “출자자들의 한양증권 지분 인수 참여 방식이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면서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KCGI 측에서 내부적으로 정리를 마친 뒤에 미팅을 제안하길 기다리고 있다”고 밝혔다.
단기 호재로 끌어올린 주가, 피해자 양산
시장에서는 KCGI를 비롯한 행동주의 펀드들의 움직임을 따라 투자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때 KCGI가 저격하는 기업에 투자해 단기 차익을 거두는 투자 방식인, 이른바 ‘강따(강성부 따라잡기)’가 유행했던 것과는 상반된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KCGI로 대표되는 한국형 행동주의가 가치투자의 본질을 흐린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 대부분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장기적 성장을 함께한다는 철학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단타’의 재료로만 활용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KCGI의 주요 포트폴리오였던 오스템임플란트에 따라 들어간 투자자들은 불과 한 달여 만에 40%가 넘는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KCGI가 2022년 12월 지분 5% 이상 보유 신고를 하고 오너 퇴진을 압박하자, 주가가 치솟은 것이다.
문제는 이들 투자자가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동안 반대편, 또는 뒤늦게 진입한 다른 누군가는 그만큼의 손해를 봤다는 점이다. 오스템임플란트는 KCGI의 지분 5% 공시가 있은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난해 8월 자진 상장 폐지했다. 기업의 본질적 가치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단기 호재’를 이용해 억지로 끌어올린 주가는 언제나 피해를 낳는 법이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행동주의를 ‘시장에서 수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전략’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지배구조 개선 등을 통해 기업의 경영 투명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고, 종국엔 본질 가치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모펀드 제1의 목표인 수익 극대화와 행동주의 펀드의 가치 실현 사이에서 균형점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