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미국 정부, HBM 중국 수출 규제 공식화 SK하이닉스, HBM4 생산에 3나노 공정 활용 삼성전자, 4나노 공정 활용 및 차세대 그래픽 D램 집중
미국 정부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중국 수출 규제를 공식화한 가운데 SK하이닉스가 내년 하반기 양산 예정인 맞춤형 HBM4(6세대) 생산에 3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파운드리 공정을 활용하기로 했다. 3㎚는 아직 HBM에는 적용하지 않은 최첨단 공정으로, 초고성능 HBM을 원하는 엔비디아 등 미국 고객사에 올인하겠다는 복안이다. 삼성전자 역시 중국 수출 규제로 미국에 화력을 집중해야 하는 만큼, 초고성능 HBM4 개발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중국 첨단반도체 수출규제 추가, HBM 포함
4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와 함께 개발 중인 맞춤형 HBM4의 ‘두뇌’ 역할을 하는 베이스다이 제작에 3㎚ 파운드리 공정을 활용하기로 했다. 당초 5㎚ 공정을 검토했지만, 삼성이 4㎚ 공정을 활용하기로 잠정 결정하자 한발 앞선 기술을 쓰기로 했다. 이르면 내년 3월께 시제품 생산을 시작할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가 공정 교체에 나선 이유는 미국 정부가 대중국 수출통제 대상 품목에 특정 HBM 제품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미국 상무부는 HBM의 성능 단위인 '메모리 대역폭 밀도'(memory bandwidth density)가 평방밀리미터당 초당 2기가 바이트(GB)보다 높은 제품을 통제하기로 했다. 특히 상무부는 이번 수출통제에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Foreign Direct Product Rules)을 적용했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만든 제품이더라도 미국산 소프트웨어나 장비,기술 등이 사용됐다면 이번 수출통제를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 3㎚ 승부수
SK하이닉스가 3㎚ 공정을 적용하는 건 엔비디아 등 고객사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엔비디아는 최신 HBM 제품의 58%를 사들이는 ‘큰손’으로, SK하이닉스 제품 대부분을 구매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최근 엔비디아가 HBM4 공급 일정을 6개월 정도 앞당겨달라고 요청하자 생산 속도를 높였다. SK하이닉스는 최고 성능의 맞춤형 HBM을 최대한 빨리 납품해 엔비디아와의 밀월 관계를 한층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HBM4에서 베이스다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HBM을 연결하는 핵심 부품이다. HBM3E(5세대)까지는 메모리 제조사인 SK하이닉스가 베이스다이를 직접 만들었지만, HBM4부터는 미세 공정이 필요해 파운드리 기업과 협업해야 한다. SK하이닉스는 베이스다이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HBM4의 성능이 크게 좌우되는 점을 감안해 TSMC와 개발한 최고 공정을 적용하기로 했다. 3㎚ 공정으로 제조하면 5㎚보다 성능이 크게 향상된다.
현재 애플의 아이폰, 맥북에 들어가는 최신 반도체가 TSMC의 3㎚ 공정에서 양산된다. 엔비디아의 GPU는 4㎚ 공정에서 생산한다. 3㎚ 공정을 활용하게 되는 만큼 내년 출시될 맞춤형 HBM4의 성능은 물론이고 전력 등 모든 측면에서 HBM3E보다 크게 업그레이드될 전망이다.
삼성전자, GDDR7으로 만회하나
삼성전자의 경우 맞춤형 HBM에 4㎚ 공정을 활용하기로 방향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SK하이닉스가 3㎚ 공정을 적용하기로 하면서 삼성전자도 자사 파운드리와 함께 TSMC의 3㎚ 공정을 활용하는 맞불을 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 중론이다.
삼성전자는 이와 함께 그래픽 D램인 GDDR(Graphic Double Data Rates Dram)에도 집중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2월 ‘반도체 올림픽’으로 불리는 제72회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24Gb(기가비트) 용량에 초당 42.5Gbps 전송 속도를 지닌 차세대 GDDR7 D램을 공개한다. GDDR7의 42.5Gbps는 역대 최고 속도다. 시장에 공개된 제품 가운데 최고 성능으로 평가받는 엔비디아 ‘RTX4090’은 마이크론의 GDDR6X를 탑재했는데 해당 GDDR6X의 속도는 24Gbps 수준이다.
미국 IT 매체 톰스하드웨어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GDDR7을 활용하면 초당 2.7TB(테라바이트)를 처리할 수 있는 대역폭을 갖춘 그래픽카드를 제작할 수 있다. SK하이닉스의 GDDR7을 활용한 그래픽카드가 초당 1.5TB를 처리할 수 있는 것과 비교해 경쟁 우위에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는 GDDR7 제품을 엔비디아, AMD 등의 차세대 그래픽카드용으로 공급해 HBM에서 빼앗긴 AI 메모리 시장 입지를 되찾겠다는 구상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의하면 2020년 GDDR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42.3%로 선두를 달리던 삼성전자는 지난해 SK하이닉스에 1위 자리를 내줬다. 지난해 SK하이닉스는 점유율 42.4%, 삼성전자는 39.4%를 기록했다.
GDDR은 당초 그래픽 처리를 위해 만들어진 D램이지만 일반 D램과 비교해 대량의 데이터를 한꺼번에 처리하는 데 특화된 AI 칩셋과 고성능 컴퓨팅(HPC), 자율주행차 등에 활용할 수도 있다. GDDR이 앞으로 HBM을 일부 대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HBM은 AI 반도체에 탑재되는 주류 메모리로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비싼 가격과 공급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해 GDDR은 HBM보다 성능은 떨어지지만, 전력 소모가 적고 가격대비성능 측면에서 강점을 갖추고 있다. 짐 켈러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캐나다 AI 반도체 스타트업인 텐스토렌트 등은 자사가 개발한 AI 반도체에 GDDR D램을 탑재하고 있다. 올해 7월 사전주문을 시작한 텐스토렌트의 AI 반도체 ‘웜홀’은 HBM이 아닌 GDDR6를 메모리로 사용한다. 성능은 엔비디아 H100 AI 반도체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가격은 20분의 1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