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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의 매드맨 전략 연이은 팽창주의 언행, 국제법 위반 비판도 멕시코·캐나다 등에도 고관세 폭탄 위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한 지 20여 일이 지난 가운데, 그의 거침없는 행보가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파나마 운하부터 가자지구, 남아프리카공화국 토지 몰수 정책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주권을 겨냥한 발언과 압박이 이어지면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과거 협상에서 충격과 공포를 조성해 상대국의 양보를 끌어낸 방식이 이번에도 통할지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러한 전략이 장기적으로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美 정부 선박에 파나마 운하 통행료 부과 않기로
5일(현지 시각) 미 국무부는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통해 "파나마 정부가 미국 정부 선박에 파나마 운하 통행료를 부과하지 않는데 합의했다"며 "이번 합의로 연 수백만 달러를 절감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날 미 국방부도 대변인 명의 보도자료를 통해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과 호세 라울 물리노 파나마 대통령이 통화해 파나마 운하의 방어를 포함한 안보상 이익을 양국이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파나마 운하의 통제·운영이 주권 문제에 속한다고 맞서온 물리노 대통령이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협박에 물러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취임사에서 "건설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미국인 3만8,000명이 희생될 정도로 힘들게 완공한 운하를 파나마에 돌려준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며 이를 환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파나마가 중국 공산당의 영향권에 있는 홍콩계 회사 허치슨 포츠 피피시(PPC)에 항구 2곳의 운영권을 맡긴 것이 협정 위반이라고 주장해 왔다. 블룸버그통신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현재 파나마 정부가 PPC와 맺은 계약을 취소할지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추진하는 토지 몰수 정책을 문제 삼아 남아공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을 통해 "남아공이 토지를 몰수하고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매우 나쁘게 대우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 전반에 대한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남아공에 대한 향후 미국의 기금을 모두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발맞춰 마코 루비오 국무부 장관은 남아공이 주최하는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회의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집권 1기에도 '매드맨 전략'으로 협상 나서
연이은 주권 침해 발언에 국제사회는 반발하고 있다.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 가자지구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을 두고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아랍권 22개국으로 구성된 아랍연맹(AL)은 미국이 가자지구를 점령해 팔레스타인 주민을 이주시키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국제법을 위반해 더 큰 불안정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 외무부도 성명에서 "강제 이주는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라고 했고, 독일 외무부도 "또 다른 고통과 증오를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과격한 행보를 '거래의 기술'로 분석한다. 마치 미치광이처럼 충격과 공포, 혼란을 유발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매드맨(madman)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뜻대로 되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압박할 것'이라고 믿게 한 뒤 갑작스럽게 긴장을 완화해 상대방이 더 많이 양보하도록 유도하는 고도의 협상 방식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그는 1기 재임 때도 멕시코에 "불법 이민을 계속 방치하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폐기하겠다" 겁박했고 이후 NAFTA 폐기와 대체 협정인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을 이끌어 냈다.
집권 1기 당시 한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다양한 압박 전술에 시달려야 했다. 201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재협상에 소극적인 한국 정부를 향해 '재협상이 아니라면 FTA를 종료하겠다'고 압박했다. 북한과는 폭언에 가까운 말싸움을 벌이다 2018년 전격적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적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직후 제6차 핵실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등 연일 도발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리틀 로켓맨’, ‘내 책상에 핵무기 발사 단추가 있다’는 등의 인신공격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그를 만나게 된다면 영광’이라는 우호적인 발언을 섞으며 극적인 만남을 유도했다.
극단적인 거래 기술, 장기적으로는 한계
1기 때보다 더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를 천명하며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도 비슷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특히 취임 20여 일이 지난 현재 관세를 무기로 휘두르면서 외교 협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이 또다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먼저 2020년 발효한 USMCA로 사실상 무관세로 왕래하던 이웃 캐나다와 멕시코를 상대로 25%에 달하는 고관세 공포탄을 쏘아 올렸다. 두 나라는 미국의 조치에 반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을 보호하기 위한 국경 단속, 펜타닐 차단 등의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당장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연합(EU)를 향해서도 '관세 폭탄'을 예고했다. 이는 미국의 대(對)EU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1차적 목표에 더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방위비 확대와 미국 테크기업들에 대한 유럽의 규제 완화 등을 노린 다중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불법 이민자 송환 문제를 놓고 미국과 대립하던 콜롬비아는 지난달 26일 미국에서 추방된 자국민을 태운 미국 군용기의 착륙을 불허했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위협에 꼬리를 내렸다.
다만 외신들은 이런 전략이 장기적으론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1기 때에도 실제 효과를 발휘한 분야는 제한적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이익을 고려한다면 극도의 무모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 거란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의 칼럼니스트 맥스 부트는 지난 달 30일 WP 팟캐스트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당시 북한과 이란, 중국과 같은 나라들에 미치광이 이론을 적용하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며 이번 임기에도 이 전략이 통할 것이라는 데에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 결정은 "시장 성과에 집착하는 그의 강경한 무역 위협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금 부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