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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사정, 전년比 악화 31%, 호전 11% 건설·철강·석유화학 순 ‘악화’ 비중 높아+ 경영정상화 힘든 D등급 급증, 부동산 '최다'

올해 기업들이 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국내 대기업 10곳 중 3곳은 지난해보다 자금 사정이 악화한 데다 경제정책 불확실성마저 5년여 만에 최악 수준으로 높아진 탓이다.
국내 기업들, 올해 자금 사정 더 안 좋다
6일 한국경제인협회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1,000대 기업(공기업·금융기업 제외, 100개사 응답)을 조사한 결과 올해 자금 사정이 전년보다 악화했다고 응답한 기업 비중은 31%로 집계됐다. 호전됐다고 답한 기업(11%)보다 3배 많은 수준이다. 나머지 58%는 비슷하다고 답했다.
자금 사정이 악화한 기업을 업종별로 나눠 보면 건설·토목(50%), 금속(철강 등, 45.5%), 석유화학·제품(33.3%) 순으로 비중이 높았다. 한경협은 이들 업종이 경기침체에 따른 수요 둔화와 글로벌 공급과잉 영향으로 장기 부진을 겪고 있어 자금 조달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풀이했다. 기업들은 자금사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고환율과 물가 부담을 꼽았다. 구체적으로는 환율 상승(24.3%)이 가장 많았고, 원자재 가격 및 인건비 상승(23.0%), 높은 차입 금리(17.7%) 등도 지목했다.
자금사정은 어려운 상황인 반면, 올해 기업들의 자금수요는 연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작년과 비교해 자금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36.0%)은 감소(11.0%)에 비해 3배 이상 많은 것으로 조사됐고, 기업의 과반(53.0%)은 올해도 작년과 유사한 수준에서 지출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금수요가 주로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부문은 원자재․부품 매입(39.7%)이 가장 많았고, 설비투자(21.3%), 차입금 상환(14.3%), 인건비․관리비(14.0%) 순으로 조사됐다.
또한 이번 조사에서 기업 5곳 중 1곳은 이자 부담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달 25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3.0%에서 2.75%로 0.25%p 인하했지만 기업 20%는 여전히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기준금리 임계치가 현재 기준금리(2.75%)보다 낮다고 응답한 기업 비중은 기준금리2.5% 응답 비중(14.0%), 2.25%(4.0%), 2.00%(2.0%) 등이었다.
대기업마저 '부도 위기'
자금 사정 악화 속 부도 위기에 내몰린 기업들도 속출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말 채권은행의 정기 신용위험평가 결과 230개사를 부실징후기업(C·D등급)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전체 부실 징후 기업은 작년보다 1곳 줄었지만 경영 정상화 가능성이 작은 D등급은 17곳 늘어 130곳에 달했다. 대부분 상황이 나빠져 C등급 기업이 D등급으로 이동한 탓에 C등급은 작년보다 18곳 줄어든 100곳으로 집계됐다. 금감원 관계자는 “경기 회복 지연에 따른 업황 부진, 원가 상승, 고금리 장기화 등에 따라 일부 한계기업의 경영 악화가 심화한 점이 원인”이라고 말했다.
1년에 한 번 하는 정기 신용위험평가 결과는 A~D 네 등급으로 나뉜다. A는 정상, B는 부실 징후 가능성을 보이는 기업이다. 부실 징후 기업인 C와 D는 다시 경영 정상화 가능성이 높은 기업(C)과 낮은 기업(D)으로 구분된다. 통상 C등급은 채권단 중심의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 D등급은 법원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는다. 특히 지난해는 부실 징후 기업 가운데 금융권 신용공여 500억원 이상인 대기업이 2곳 늘어난 11곳으로 조사됐다. 그중 D등급이 전년 2곳에서 7곳으로 증가했다. D등급 대기업은 2021년과 2022년엔 한 곳도 없었다.

"진짜 위기는 하반기부터" 기업들 미리 자금 조달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초부터 많은 기업이 은행으로부터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 한 제조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우리나라 기업들 상당수는 신년 상반기까진 그나마 버틸 체력이 있지만, 진짜 돈줄이 마르기 시작할 하반기에 금융회사를 찾아가면 우릴 만나주기나 하겠나"라며 "올해 1분기 내 연중 필요한 자금 조달을 모두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는 기업들의 자금 경색 위기가 확산하기 전 타기업들보다 미리 현금을 확보해 두겠단 전략과도 같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가 다시 재현된다면 건설회사들의 자금 소요가 크게 늘어나고 금융권의 문턱이 높아질 것이란 우려도 이 같은 판단의 배경이 되고 있다.
환율이 불안정한 상태를 감당하지 못할 중소·중견 기업들이 금융권에 손을 벌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도 선제적인 자금 확보의 요인이다. 국내 한 지주회사 관계자는 "반도체, 철강, 자동차, 건설, 제약·바이오 등 어떤 산업군도 긍정적인 전망을 하기 어려운 시점"이라며 "본격적으로 기업들의 실적이 꺾이기 시작하면 금융사를 태핑하는 기업들이 늘어날 텐데, (우리회사는) 미리 주채권은행을 만나 기업 대출 한도를 최대한 열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