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美 국채금리, 단기채·장기채 가리지 않고 상승세 트럼프 감세 정책·국가신용등급 하락 등이 원인 ECB "美 국채 매도세, 시장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례적"

미국의 국채금리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감세 정책, 미국 국가신용등급 하락 등 악재가 누적되며 재정 적자에 대한 시장 우려가 확대된 결과다. 대표적 안전자산인 미국 국채가 불황 속에서도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는 가운데, 길을 잃은 자금은 유로존 등 대체 투자처로 속속 유입되는 추세다.
외면받는 美 국채
21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재무부는 총 160억 달러(약 21조9,000억원) 규모의 신규 20년물 국채를 발행했다. 정부 자금 조달을 위해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입찰이지만, 최근 미국의 경제 정책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이번 입찰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평소보다 컸다.
이번 입찰에서 낙찰된 국채의 평균 금리는 5.047%로 집계됐다. 이는 최근 이뤄진 6차례 입찰의 평균 금리(4.613%)를 크게 웃도는 수치이자, 입찰 직전 시장에서 형성된 금리보다도 0.011%p 높은 수준이다. 입찰이 이뤄진 직후 20년물 국채 금리는 5.103%까지 치솟으며 올해 최고치를 경신하기도 했다. 같은 날 장 마감 직전 30년물 금리도 5.09%까지 치솟았다. 10년물 금리는 4.6%를 돌파했고, 2년물 금리도 4%를 넘어섰다.
이 같은 국채 금리 상승세는 증시를 비롯한 자본 시장에서 부정적인 신호로 인식된다. 일반적으로 국채금리가 상승하면 가계와 기업의 차입 비용이 커지며 경기 둔화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국채금리가 줄줄이 상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날 미국 3대 주가지수는 모두 한 달 만에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1.91%, 에스앤피(S&P) 500지수는 1.61%, 나스닥 종합지수는 1.41% 각각 하락했다.
美 재정 적자 우려 확대돼
시장은 미국 국채 투매가 벌어진 배경에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감세 법안이 있다고 본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감세 법안 통과를 위해 공화당 강경파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화당 소속인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세금 감면 조치(TCJA)를 연장하고, 팁과 초과근로 수당을 면세하는 내용을 담은 이른바 '하나의 아름다운 법안(메가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원 처리 일정을 진행 중이다. 미 의회 합동조세위원회(KCT)에 따르면, 해당 법안이 통과될 시 향후 10년간 연방정부 재정 적자는 2조5,000억 달러(약 3,440조원) 이상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하락 역시 채권 수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16일 국제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로 꼽히는 무디스는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1'으로 하향 조정했다. 신용등급 강등의 원인으로는 급증하는 연방정부 부채와 만성적인 재정 적자가 꼽혔다. 미 재무부, 의회예산국(CBO)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 연방정부가 짊어진 부채는 약 36조2,000억 달러(약 5경700조원)에 달한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22조7,000억 달러) 대비 무려 59% 급증한 수준이다. 미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 역시 2019년 107%에서 지난해 123%까지 확대됐다.
미래 전망도 상당히 어둡다. 무디스는 “지속적인 재정 적자와 금리 상승으로 인해 미국의 정부 차입이 가속화할 것”이라며 “현재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어떤 예산안도 수지 불균형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관세 정책 등이 사실상 재정 여건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실제 미국 전체 세수에서 관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2% 미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 자금 흐름, 평소와 다르다?
이 같은 악재들은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자들의 근본적인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미국 국채는 채무불이행 위험이 적어 가장 안전한 자산(riskless asset)으로 꼽힌다. 주식은 물론, 위험도에 따라 신용등급이 매겨지는 회사채와 비교해도 무위험 투자자산에 가깝다.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 파산 우려가 낮은 미국 국채를 사려는 자금이 몰리며 국채값이 뛰어오를 정도다. 이와 관련해 한 시장 전문가는 "요즘처럼 불황이 지속될 때는 미국 국채값이 상승하며 국채금리가 하락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최근 이어지는 국채금리 상승세는 미국 국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하며 발생한 이례적 현상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각국 은행들은 현 상황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1일 발표한 금융안정성 검토 보고서에서 "지난달 시장 매도세는 자산 간 전통적인 상관관계가 무너진 게 특징"이라며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국채로 자금이 유입되고, 미 국채 매도세가 나온 건 시장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례적"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투자자들이 미국 정책의 불확실성 탓에 미국 자산에 더 높은 위험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안전자산의 가치 하락은 미국 자산에 대한 광범위한 재평가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CB는 올해 들어 계속되는 유로화 강세 역시 미국 정책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기준금리가 유로존보다 높고, 미국과 유로존 간 금리 차가 꾸준히 확대되는 상황에도 유로화 가치가 상승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직후 이른바 '트럼프 트레이드' 효과로 인해 유로 패리티(1달러와 1유로 가치가 동등해지는 것)를 목전에 뒀던 유로화는 최근 1.15달러 수준까지 절상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