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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정부 정책 직격한 ‘오마하의 현인’
관세 전쟁의 끝은 결국 달러 약세?
저무는 강달러 시대, 연초 대비 8% 하락

은퇴를 목전에 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달러는 지옥으로 간다”고 언급하며 미국 정부의 정책과 관련한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보호무역 기조가 결국 환율 전쟁으로 이어지며 달러 약세를 부추긴다는 게 그의 경고다. 이를 뒷받침하듯 달러 가치는 올해 들어서면 8% 넘게 하락했으며, 이는 일시적 조정이 아닌 구조적 전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해석이다.
“정책 결정권자들, 근시안적인 접근 주의해야”
21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달 3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 CHI헬스센터에서 열린 제60회 버크셔해서웨이 연례 주주총회에 참석해 은퇴를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달러를 “지옥으로 갈(going to hell) 통화”라고 표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달러 가치가 훼손되면서 가치 하락 또한 지속될 것이란 경고다.
버핏은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를 문제 삼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부터 펼쳐 온 강경한 대중국 견제 전략이 글로벌 공급망을 왜곡시킨다고 본 것이다. 특히 미국 내부 소비자와 기업이 더 비싼 제품과 원재료를 감수하게 된 상황을 두고는 “자국 산업 보호라는 명분 뒤에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고 꼬집으며 “이는 자유무역의 기본 정신과도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책 결정권자들의 근시안적인 접근이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비관적 전망은 하나둘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 16일 미국의 국가신용 평가를 최고 등급인 Aaa에서 Aa1으로 강등했고, 이 여파로 미 국채 금리가 5% 선을 돌파했다. 가뜩이나 누적되는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팽배한 가운데 비관적 전망까지 겹치며 투자자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했고, 그 결과 미국 금융 시스템 전반의 신뢰도까지 흔들리게 된 것이다.

포트폴리오 내 달러 비중 줄이는 ‘큰 손’들
국내 전문가들 또한 미국의 관세 정책이 달러화 약세를 부추길 것이라는 데 관측이 일치했다. 변정규 미즈호은행 자금실 그룹장은 “금융 시장의 변동성은 늘 존재하지만,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는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그 영향도 상상을 초월해 전개되고 있다”고 진단하며 “사상 초유의 상호 관세와 보복관세는 향후 외환 시장을 넘어 글로벌 경제질서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단언했다.
조범준 하나은행 자금시장그룹 그룹장 역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을 예로 들며 “당시 달러·원 환율도 1,100원대에서 1,200원대로 크게 상승하며 최근과 비슷한 상황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의 특징은 미 국채가 갑작스러운 하락세를 보이는 가운데 미 달러화도 큰 폭으로 하락하는 것”이라며 “이는 매우 이례적으로, 글로벌 투자자들의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악화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예의주시하는 모양새다. 월가의 주요 투자은행들은 달러 약세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관세 부과가 무역 상대국들의 반격을 야기하고, 이는 각국의 환율 개입과 금리 정책으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특히 유럽 국가들과 신흥국들에선 달러 중심이던 외환 보유 전략을 다변화하려는 움직임도 관측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 글로벌 투자은행 관계자는 “최근 미국 내에서도 달러 비중을 줄이고 금, 유로, 위안화 등 대체 자산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늘리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면서 “단순한 투자 전략이 아니라, 장기적인 통화 가치 하락을 전제로 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이어 “버핏의 경고는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시장이 이미 반응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달러 가치 장기적 조정 국면 진입
실제로 달러화 가치는 올해 들어 꾸준한 우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바클레이즈에 의하면 4월 말 기준 달러 인덱스(DXY)는 연초 대비 8.3% 하락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조정 수준을 넘어 구조적 변화의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연준의 금리 동결과 더불어 무역 적자 확대, 정치 불확실성, 글로벌 자산 다변화 등의 복합 요인이 달러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는 게 바클레이즈의 진단이다.
여타 투자은행들도 달러 가치 하락세가 일시적인 흐름이 아니라 장기적인 조정 국면에 진입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들어 달러가 급격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우리는 달러가 더 하락할 것으로 믿는다”며 “구조적 측면에서 유럽 통화가 이러한 추세의 주요 수혜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과거 강달러 국면이 미국 내 금리 인상과 안전자산 선호에 기반했던 것이라면, 지금은 반대로 금리 인하 가능성과 미국 채권에 대한 불신이 달러 매도를 유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일각에선 이 같은 하락 전망이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20년대 들어 이어져 온 달러 흐름은 미국의 금리 정책과 세계 경제 불안에 기초한 일종의 ‘비정상 상태’였고, 지금은 단지 본래 수준으로의 회귀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캐피털이코노믹스는 “미국 경제는 여전히 견조한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달러가 완전히 몰락하리라는 극단적 시나리오는 지나친 우려”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