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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휴양지에서 러 외무장관 만난 김정은 우크라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 확인 북러 정상회담 연내 성사 가능성도 타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수도 평양이 아닌 강원도 원산으로 초청해 극진히 환대했다. 원산은 김 위원장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대표적 관광지구로, 이번 회동에서 북한식 관광 외교의 전초기지로 활용됐다. 이 자리에서 북한은 러시아에 6,000명 규모의 추가 파병과 군수물자 제공을 약속했고, 러시아는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 지지와 군사 기술 이전으로 화답하며 양국의 혈맹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10년에 걸쳐 조성한 관광지구 원산에서 회동
13일 북한 국영방송 조선중앙TV는 "김 위원장이 12일 원산에 있는 자신의 전용 요트에서 라브로프 장관을 만나 양국 간 완전히 일치된 입장을 재확인했다"고 전하며 김 위원장이 면담을 마치고 라브로프 장관을 직접 환송하는 장면을 공개했다. 이번 회동에서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을, 러시아는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 획득을 위한 지지를 재차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북한군 추가 파병과 군사기술·경제협력, 북·러 정상회담 개최 등 다양한 현안이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면담 장소다. 김 위원장의 출생지로 알려진 원산은 북한 남동부의 대표적인 휴양지다. 최근에는 2014년 개발에 착수해 10년 넘게 공들여 조성한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가 완공됐다. 환영 연회가 열린 원산 명사십리호텔은 김 위원장이 지난달 부인 리설주, 딸 김주애와 함께 방문해 개장 준비 상황을 직접 챙긴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북한이 러시아 외교 수장을 원산에 초청한 것은 김 위원장이 러시아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에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이 대규모 파병과 무기 제공 등의 대가로 러시아 측에 ‘원산으로 더 많은 러시아 관광객을 보내 달라’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라브로프 장관에게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 개장 이후 첫 외국 손님”이라고 강조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당국은 “최근 김 위원장의 적극적인 외교 행보를 고려해, 평양보다는 원산에서 만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며 "그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면담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북러 정상회담 개최 시기 두고 미묘한 온도 차
외교 전초기지로 원산을 공개한 북한뿐 아니라 러시아 역시 이번 회동을 계기로 양국의 혈맹 관계를 굳건히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북한이 가장 중요한 지원 세력으로 부상한 만큼, 북한의 태도가 변하지 않도록 연내 김 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라브로프 장관은 김 위원장에게 "아주 가까운 미래에 김 위원장과 직접 접촉을 이어가기를 기다린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반면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파병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아낸 진 뒤에 러시아를 방문하기 위해 신중하게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다. 이는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 없이 결렬된 ‘하노이 노딜’을 교훈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 위원장이 섣불리 해외로 나가기보다는 최대한 북한으로 상대방을 불러들여 이익을 극대화한 뒤 움직이려는 전략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달리 북한 매체가 러시아 대표단을 방북과 관련해 북러 정상회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점은 양국 간 미묘한 온도 차를 방증한다.
다만, 김 위원장이 지난달 평양을 방문한 세르게이 쿠주게토비치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서기와 만나 6,000명 추가 파병에 합의한 만큼 이르면 이달 안에 병력이 러시아로 이동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해당 병력은 군사 건설 인력 5,000명과 지뢰 제거 작업을 맡는 공병 1,000명으로 구성되며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 지역에 배치될 예정이다. 쿠르스크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 러시아가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다가 탈환한 지역으로, 북한군은 이곳에서 도로·다리·건물 등 전쟁 피해 인프라 복구와 지뢰 제거 작업에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 "러시아 지원으로 北 군사 역량 강화"
한편 우크라이나는 북러 혈맹 강화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러시아 파병을 계기로 북한군이 군사 역량을 키우고 러시아의 기술 이전을 통해 무기의 파괴력까지 한층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국방부 정보총국(HUR)은 "북한군의 핵·재래식 군사 능력이 파병 기간 크게 강화됐다"며 "향후 수개월 내 3만 명 이상을 추가로 러시아에 파병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HUR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특수부대인 11군단 소속으로, 약 9,500명이 쿠르스크 지역에 투입돼 이 중 4,000여 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HUR은 이번에 추가 파병되는 북한군이 오는 9월 열리는 러시아·벨라루스 합동 군사훈련 ‘자파드(Zapad) 2025’에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훈련은 주로 러시아·유럽 접경 지역에서 진행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방을 겨냥한 방어 및 공격 시나리오를 다룬다. 특히 2021년 9월에 실시한 자파드 훈련에서는 군사 훈련을 명분 삼아 20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러시아 서부 국경지대로 이동해 2022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공격 준비를 은폐하는 데 활용된 전례가 있어, 이번에도 유사한 작전이 재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러 군수 물자 지원과 북한의 군사 기술의 고도화 역시 우려되는 지점이다. HUR은 러시아의 자금 지원을 받아 군수산업을 강화한 북한이 3개월 내 150만 발의 포탄을 추가로 러시아에 전달할 것으로 파악했다. 포탄뿐 아니라 미사일에서도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HUR은 "북한이 러시아의 기술 지원을 통해 '북한판 이스칸데르 미사일'로 불리는 KN23의 정확성을 크게 높였다"며 "KN23이 처음 발사됐을 때는 목표 지점에서 15㎞가량 빗나갔지만, 그 후 미사일을 개량하면서 시작해 현재는 오차 수준이 수백 미터에 불과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