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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發 리스크'에 달러 약세 이어져 세계 외환보유고 내 달러 비중도 줄어 ECB "유로화, 아직 투자자 설득 못 해"

미국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유로화가 대안 통화로 부상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지는 가운데,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강연에서 '글로벌 유로 시대'의 도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유로화가 진정한 대안 통화로 자리 잡으려면 회원국 간 정책 조율, 미 국채 수준의 안전자산 공급, 금융시장 통합 등 제도적·정치적·시장 구조적 과제들이 선결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달러의 지배적 역할에 불확실성 제기"
26일(현지 시각) 라가르드 ECB 총재는 독일 베를린 위치한 국제정책·행정대학원 헤르티스쿨(Hertie School)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달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등 통화시장의 흐름이 변화하면서 글로벌 유로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이는 유럽이 자신의 운명을 더욱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세계 경제의 개방성과 다자간 협력이 보호주의와 힘의 경쟁으로 대체되고 있다"며 "그동안 이러한 체제를 지탱해 온 달러의 지배적 역할에도 불확실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주요국 외화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이 낮아지고 있지만, 유로화가 아직 투자자를 완전히 설득하지 못해 자금이 금으로 쏠리고 있다"며 "달러를 대체하는 것은 단순히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유럽 스스로 쟁취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현재 주요국 외화보유고 중 유로화 비중은 20%로 라가르드 총재는 유로화 지위를 높이기 위해 △ 글로벌 무역에서 역할 확대와 강력한 군사동맹 등 지정학적 기반 △ 경제개혁과 자본시장 통합 등 경제적 기반 △ 유럽연합(EU)의 정치적 단합 등 법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앞서 라가르드 총재는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24일 인터뷰에서도 "유럽은 건전한 통화와 독립적 중앙은행이 있는 안정적인 경제·정치권역으로 인식된다"고 밝힌 바 있다. 루이스 데긴도스 ECB 부총재도 지난달 "현시점에서 유로가 달러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지만, 몇 년 안에 그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출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같은 ECB 당국자의 발언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흔들고 있는 글로벌 통화 질서를 유럽에 유리한 기회로 전환하려는 전략"이라고 논평했다.

금·엔화 등 대체 자산에 대한 수요 급증
실제 글로벌 통화시장은 미국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 확대 속에 금이나 엔화 등 대체 자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달러 1강(强)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6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전 세계 외환보유고는 12조3,641억 달러(약 1경7,000조원)이며 이 중 달러가 차지하는 비율은 57.8%로 집계됐다. 이는 1995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한편, 중국은 세계 외화보유고의 4분의 1에 달하는 약 3조4,50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보유고는 외환 위기나 수입 결제 등 긴급 상황에 대비해 각국 정부가 비축해 둔 자금으로, 외화 표시 채권·예금·금 등이 포함된다. 2000년 전후로 70%를 넘었던 달러 비중은 매년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 몇 년간 미국의 적국 대상 금융 제재 강화 조치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확대에 대응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보유 자산을 분산하면서 달러 의존도를 낮춰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에는 여러 국가들이 리스크 회피 차원에서 달러를 줄이고 다른 자산을 확대하면서 ‘미국 통화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다.
달러의 대안으로 부상한 것은 금이다. 미국이 러시아, 중국 등을 달러 결제망에서 배제하는 금융 제재를 반복적으로 시행하자 해당국은 회피 수단으로 금의 비중을 늘려 왔다. 세계금위원회(WGC)에 따르면 러시아는 2024년 말 기준 외환보유고의 32%를 금(약 2,300톤)으로 보유 중이다. 일본 엔화도 대체 자산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말 세계 외환 보유고에서 엔화 비중은 5.82%로 3년 연속 증가했다. 일본은행(BOJ)이 오랜 제로 금리 정책을 종료하고 금리를 인상하자 일본 국채 수익률이 상승하면서 엔화 보유 매력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국가별 분절된 경제정책은 유로존 한계
다만, 이러한 호재에도 불구하고 유로화가 진정한 대안 통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제도적·정치적·시장 구조 측면에서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유로존은 단일 통화권임에도 회원국별로 재정정책과 구조개혁 방향이 달라 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고 일관된 정책 대응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일례로 2010년대 초반 그리스 재정위기 당시, 긴축정책과 구제금융을 둘러싸고 독일·프랑스 등 핵심국과 남유럽 국가 간의 극명한 입장차를 드러내면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유로화의 신뢰도가 크게 흔들린 바 있다.
유로존이 미 국채처럼 글로벌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대량으로 보유할 수 있는 안전자산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미국은 단일국가로서 국채를 대규모 발행하지만, 유럽은 회원국별로 국채를 발행해 유로화 표시 자산이 분산돼 있다. 독일 국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의 국채는 신용등급과 시장 신뢰도에서 차이가 크다. EU 차원에서 공동 채권 발행이 확대되고 있으나, 아직 미 국채 시장 규모에 비하면 매우 제한적이고 유동성과 신용도 측면에서도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다.
시장 구조적인 차원에서도 자본시장과 은행 시스템 간의 통합이 미진해 유로화의 국제적 활용도를 높이는 데 제약이 따른다. EU가 자본시장연합 등을 통한 통합을 추진하고 있으나 국가별로 금융 규제와 감독 체계, 시장 인프라가 달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한계가 있다. 이로 인해 위기 시 자금 조달과 위험 분산이 어려워 유로화 기반 금융상품도 투자자에게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에 비해 은행 중심의 금융 구조가 강해 주식시장 시가총액, 금융상품 다양성, 유동성 측면에서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