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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원화·인도 루피화·태국 바트화 11월까지 1% 미만의 완만한 강세 전망 달러 미래, 美 무역수지 악화·경제둔화가 전환점

‘화폐의 왕’ 미국 달러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2차 세게대전 종전 이후 80년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폐의 자리를 굳혀온 달러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취임 이후 흔들리고 있다.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걸고 당선된 후 지난 100여 일에 걸쳐 밀어붙인 정책들이 오히려 달러의 힘을 빠지게 만든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글로벌 외환시장에서는 아시아 신흥국 통화들이 다시 주목받는 모양새다.
亞 신흥국 통화 강세
4일(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5월 30일부터 6월 4일까지 50명 이상의 외환 전략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조사 대상 신흥국 통화의 절반 이상은 강세를 유지하거나 좁은 범위 내에서 거래될 것으로 예상됐다. 나머지 통화들도 올해 강한 상승분의 일부를 되돌리는 범위 내에서 강세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조사됐다.
연초만 해도 미국 경제의 견고함,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인하 지연,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 우려 등으로 인해 신흥국 통화는 올해 어려운 한 해를 보낼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미국 경제 예외주의에 대한 기대를 거두며 달러화는 연초 이후 약세로 전환했고, 신흥국 통화의 상승 기대감이 되살아났다.
아시아 통화 중에서는 중국 위안화가 내수 부진과 미국과의 관세정책·수출통제 문제로 인한 대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국의 강력한 관리 속에 일정 범위 내 움직임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됐다. 인도 루피화, 한국 원화, 태국 바트화는 모두 11월 말까지 1% 미만으로 소폭 상승하며 안정적이고 완만한 강세를 나타낼 것으로 관측됐다.
관세 정책에 달러 약세
달러 약세에 힘을 보탠 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상보다 광범위하고 불규칙한 관세 정책과 재정 악화 전망이 달러와 미국 자산에서 자금 이탈을 촉발하면서 달러 약세 전망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2일 대규모 관세 인상을 발표한 뒤 대만 달러화가 신흥국 통화의 상승을 주도하면서 대다수 신흥국 통화는 달러 대비 강세를 보였다. 대만 달러는 4월 2일 이후 지난달 8일까지 달러화 대비 9.6% 상승했다. 이어 한국 원화도 달러 대비 4.8% 절상됐고 멕시코 페소(4.2%), 체코 크로나(4.2%), 태국 바트(3.9%) 및 말레이시아 링깃(3.7%) 등도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JP모건뿐만 아니라 모건스탠리 등 주요 투자은행(IB)들은 4월 초까지만 해도 무역 전쟁으로 신흥국 통화가 약세를 보일 것으로 관측했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전망이 모두 빗나갔다.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 부과로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에서 이탈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IB ING의 크리스토퍼 터너 외환전략 총괄은 "현재로서는 달러가 다소 약세를 보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밝혔다. 그는 "달러 약세가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며, 이는 투자자들이 신흥시장 통화를 하락 시점에 매수하는 심리를 유지하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원한 강세는 없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2기 취임 후 100여 일 동안 내놓은 정책들은 ‘룰을 잘 지키는 나라 미국’이라는 오랜 신뢰에 타격을 줬다. 그 결과 미국의 주식·채권·통화가치가 모두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여전히 세계의 압도적 최강대국인 미국에 대한 신뢰가 이대로 점점 무너질지, 혹은 회복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트럼프의 주장대로 이런 조치가 무역·재정 수지를 개선시키고 미국의 제조업을 부흥시켜 미국에 대한 신뢰가 더 견고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지점은 영원한 강세는 없다는 것이다. 달러 강세가 이어지면 미국 무역수지는 악영향을 받는다. 특히 달러 강세와 자국의 호경기에 기반해 해외 수입품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며 기록적인 재정 및 무역 적자를 기록한 미국은 향후 대규모 무역 적자에 대한 재조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될 수 있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유지해 온 고금리 영향으로 미국 경제 역시 일정 수준 둔화 기조를 보이고 있다. 둔화 기조가 이어졌을 때 성장 둔화를 제어하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금리 인하는 달러 강세 기세를 꺾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밖에 2012년 아베노믹스 이후 12년간 이어져 온 엔화 약세의 부작용으로 물가 상승 및 수출과 내수 양극화를 심하게 겪고 있는 일본이 추가적인 엔화 약세를 제어하고자 한다면, 선진국의 통화 약세 기조 역시 일정 수준 약화할 수 있다. 미국의 성장 둔화와 금리 인하, 그리고 선진국 통화 약세 기조 제한 등은 달러 강세의 전환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주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