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관세 압박 속 한국과 일본의 균형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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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관세와 반도체 규제로 동북아 교역 질서 변동 한·일, 안보는 미국 동맹 유지·경제는 중국 협력 병행 관세와 규제 지속 시 대중 균형 전략 강화 전망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이 2025년 4월 수입품에 10% 관세를 일괄 부과하면서 동북아 교역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대규모 무역 적자국에는 최대 50% 보복관세까지 가능해 한국과 일본 모두 직접적인 압박에 노출됐다. 안보 동맹국의 관세 조치가 현실화되자 양국은 첨단 반도체 수출 규제 불확실성까지 떠안게 됐다. 이 같은 환경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중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전략적 해빙의 배경과 위기관리
이번 한일 관계의 해빙은 감정적 화해가 아니라 현실적 계산의 산물이다. 8월 말 이시바 총리와 이재명 대통령은 17년 만에 공동성명을 내고 서로를 ‘파트너’로 규정하며 미래지향적 협력을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했고, 광복절 경축사에서 일본을 ‘중요한 동반자’로 표현했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뒤 중국에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던 이시바 총리도 한국과의 관계 안정이 미국의 거래적 무역정책 속에서 고립을 줄이는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양국은 과거사를 유보할 경우 수출 규제 예외를 공동으로 협상하고, 관세 대응을 조율해 미국과의 협상에서 상호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이는 이념적 화해가 아니라 위기관리 차원의 접근이다. 그러나 불안정 요인도 크다. 이시바 총리의 정치적 기반은 약하고, 이 대통령 역시 경기 둔화 시 반일 정서를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무역 구조 변화와 중국의 부상
중국은 일본과 한국 모두의 최대 교역국이다. 2024년 일본의 대중 수출 비중은 17.6%, 수입 비중은 22.5%였으며, 한국은 대중 수입 1,400억 달러(약 189조원), 수출 1,250억 달러(약 169조원)를 기록했다. 미국의 관세 전면화로 중국은 별다른 양보 없이도 시장 안정성만으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이 같은 환경에서 일본과 한국은 중국에 과도하게 기울 필요는 없지만, 불필요한 충격은 피해야 한다. 2024년 부활한 한·중·일 정상회의는 이를 보여준다. 인적 교류와 과학 협력, 경제 조정 등 관계의 장치를 마련해 두고 주요국 정책이 불안정할 때 활용하는 방식이다.

주: 국가-일본, 한국(X축), 교역 규모 및 비중(Y축)/대중국 수출(갈색), 대중국 수입(분홍색), 대중국 수출(진한 회색), 대중국 수입(연한 회색)
반도체 규제와 정책 흐름
미국은 중국 내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허가 요건을 강화하고, 9월 초부터 일부 기업에 부여했던 예외 조치를 취소하거나 재검토하고 있다. 한국의 메모리 기업과 일본의 장비 기업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같은 위험에 놓여 있다. 예외가 철회되면 공급망이 끊기고 생산 일정이 지연되며 비용이 급증한다. 생산 공정이 중국 밖에서 이뤄지더라도 중국 내 장비·부품 의존도가 높아 피해를 피하기 어렵다.
미국 정부는 동맹국에 수출 통제를 따르도록 요구하며, 필요한 경우 개별 협상을 통해 제한적 예외를 신청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경우 시장 접근과 행정 절차에서 예측 가능성을 보장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한국과 일본에 이는 감정적 선택이 아닌 계산된 대응이다.

정치적 압력과 균형 전략
한국에서는 좌파 성향 정부가 과거 반일 정서를 동원하거나 중국에 기울던 흐름에서 벗어나, 관세와 규제로 인한 경제 부담을 이유로 일본과의 협력을 선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시바 총리가 중국에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경제적 위험을 줄이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유지를 모색한다.
이 과정에서 안보는 미국 동맹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의 협력으로 위험을 완화하는 이중 압력이 나타난다. 미국 외교 당국의 우려는 이러한 접근이 단순한 위험 분산을 넘어 전략적 균형으로 발전할 가능성이다. 실제로 1981년 한국 군사정권은 미국이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북한과 협력할 수 있다고 압박했고,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수용하며 한발 물러선 바 있다. 지금의 무대는 군사가 아니라 무역이지만, 협상 방식은 유사하다.
구조적 변화와 전망
일부에서는 이번 한일 공조가 새로운 흐름이 아니라고 본다. 과거에도 미국의 관심이 다른 지역으로 쏠리면 양국은 현실적 협력을 시도해 왔고, 2024년 3자 정상회의 복원도 그 연장선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다르다. 첫째, 미국의 관세 정책이 동맹국과 경쟁국 모두를 압박하는 전면적 조치라는 점이다. 둘째, 반도체 규제가 제재 대상 기업 지정 수준을 넘어 기존 수출 허가 취소와 재검토로 이어져 한국과 일본 기업의 생산망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중국의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 특별한 양보 없이도 안정적인 시장 접근만으로도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은 안보는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경제 안정은 중국과의 협력을 병행하는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크다.
정책 선택의 기로
관세와 규제의 압박은 한국과 일본에 불가피한 선택을 강제했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비용을 감수할지, 아니면 중국과의 제한적 협력을 통해 안정을 도모할지의 문제다. 두 나라는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지키면서도 중국과의 갈등을 완화하고 상호 협력을 통해 위험을 관리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이 접근은 이념적 시각에서는 불편할 수 있으나, 제조업과 기술 기반에 의존하는 양국 경제 구조에서는 현실적인 선택이다. 미국 법원이 비상 관세 권한을 제한할 경우 단기 압박은 완화될 수 있지만, 관세와 규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전략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A Narrow Channel: East Asia’s Pragmatic Pivot Under Tariff Shock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