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금 통로에서 부실 뇌관으로” 카드사 영업 확장 속 ‘기업 외상값’ 6조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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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단위 빌려도 장부엔 ‘무차입’, 회계 사각지대 만기 수개월 불과, 상환·재조달 실패 시 현금 유출 부담 자금 시장 경색 시 기업·카드사 연쇄 부실 위험

구매전용카드 사용이 1년 반 만에 3배 이상 급증하며 6조원을 돌파했다. 카드사들이 가계대출 규제와 수수료 인하로 악화한 수익성을 보완하고 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기업 대상 영업을 공격적으로 확대한 영향이다. 이에 제조·건설·정유·화학 등 대규모 설비·원재료 산업 전반에서 단기 운전자금 확보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만기가 수개월에 불과한 차환 구조에 의존하는 만큼 잠재 부실 우려도 커지고 있다.
구매카드 이용 잔액, 3배 이상 증가
10일 여신업계와 나이스신용평가 등에 따르면 최근 수년 새 기업들의 구매카드 이용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구매카드 이용 잔액은 2023년 말 1조9,100억원에 그쳤지만 지난해 12월 말 5조5,100억원으로 늘었고, 올해 6월 말 기준 6조3,500억원으로 확대됐다. 불과 1년 반 남짓한 기간에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회사별 잔액을 살펴보면 올해 상반기 말 기준 SK에너지가 3조1,585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현대건설 1조1,801억원, 한화솔루션 1조1,285억원, LG디스플레이 1조1,193억원, 롯데케미칼이 1조986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이어 SK인천석유화학 8,181억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7,350억원, SK지오센트릭 6,250억원, 현대엔지니어링 4,301억원, 포스코이앤씨 4,258억원, 여천NCC 2,322억원, SK온 398억원 등의 순이다. 업종별로는 에너지·정유·화학과 건설, 디스플레이 등 설비·원재료 결제 규모가 큰 산업에서 잔액이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났다.
구매카드 결제가 급증하면서 카드구매대금을 유동화시킨 AB전자단기사채(ABSTB) 발행 규모도 크게 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유동화 대상 기초자산이 ‘매출채권’인 AB단기사채 발행액은 올해 상반기 기준 총 18조5,257억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13조6,708억원) 대비 5조원가량 증가한 수치다. 해당 유동화 단기사채는 기업 구매카드로 결제한 매출채권을 증권사가 세운 유동화전문 특수목적법인(SPC)이 발행해 일반 개인투자자들이 파는 증권으로, 만기 3개월짜리다.
본업 흔들리는 카드사, ‘저마진’ 구매카드로 땜질
기업 간 카드 거래가 급증한 것은 업황이 악화한 산업 중심으로 대금을 카드로 결제하는 기업이 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대출을 받거나 외상매출채권, 어음 등으로 대금을 결제한다. 하지만 이런 결제 방식은 금융비용 부담이 큰 데다 회계 처리, 정산 과정이 복잡하고 번거롭다. 반면 구매카드는 결제 대금이 신속하게 집행되고 조건이 까다롭지 않으며, 납품업체는 먼저 돈을 받고 회사는 나중에 갚는 구조라 서로 이익이다. 이를 통해 기업은 단기 운전자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유동성 위기가 커지는 건설, 석유화학, 유통업 등을 중심으로 구매전용 카드 결제가 늘어나는 이유다.
여기에 직접 차입·회사채 대비 조달 조건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점도 사용 확산세를 뒷받침한다. 통상 금리 수준과 스프레드, 회사채·기업어음(CP) 창구의 수요·공급 사정에 따라 체감 비용과 실행 난도가 달라지는데, 구매카드를 통한 조달은 프로그램화된 구조 덕분에 탄력적으로 접근하기 쉽다.
하지만 리스크도 적지 않다. 구매카드는 장부상 ‘차입금’이 아니라 외상(매입채무·미지급금)으로 분류돼 겉보기엔 위험도가 낮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금으로 반드시 갚아야 하는 채무다. 만기가 짧아 차환 의존도가 높고, 시장이 흔들리면 새 자금이 막혀 결제 자금이 한꺼번에 필요해 유동성 쇼크로 번질 수 있다는 의미다. 외상을 늘리면 일시적으로 영업현금흐름이 좋아 보이는 착시가 생기지만 결제 시점에 현금 유출이 되돌아 커진다. 게다가 수수료(사실상 금리) 부담이 존재하고, 특정 카드사·프로그램에 쏠리면 한도 축소·조건 악화 시 충격이 증폭될 수 있다.
이 같은 우려에도 카드사들이 구매카드 영업을 확대해 온 건 카드사의 수익성이 가계대출 규제 강화, 가맹점 수수료율 인하로 악화하고 있어 매출이라는 외형 성장이라도 노리기 위함이란 평가가 많다. 실제 기업계 카드사가 은행계 카드사 대비 매출 확대가 용이한 영역인 만큼, 이를 카드사 매출 순위를 가를 기준에 포함해도 되느냐가 업권 내에선 지속적인 논쟁거리다. 현재는 7개 전업 카드사(신한·삼성·국민·현대·우리·하나·롯데카드) 중 KB국민카드만이 이를 법인카드 실적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KB국민카드 입장에선 경쟁사 대비 연간 수조원의 매출액이 덜 잡히는 구조다.
일각에선 작년 7월부터 적용된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카드사들이 법인 회원 지키기를 강화한 영향이란 시각도 있다. 이 시기부터 카드사가 법인 회원에 제공할 수 있는 혜택 규모가 카드 이용금액의 0.5% 이내로 제한됐기 때문이다. 공격적 마케팅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줄어들면서 후발 카드사가 기존 카드사의 법인 회원을 뺏는 구조가 어려워진 셈이다. 이에 일부 카드사들은 사실상 원가 수준으로 신용판매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라도 법인 회원 기반을 확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홈플러스 사태’ 터지자 영업 축소
다만 올해 홈플러스 사태가 불거진 이후 일부 카드사들을 중심으로 구매카드 영업을 축소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구매카드 거래액 1위인 현대카드는 지난 7월부터 저신용 기업에 대한 거래를 줄이기로 했다. 한도를 축소하거나 신규 발급을 제한하는 식이다. 거래액 3위인 신한카드도 최근 유통사를 대상으로 한 구매카드 발급을 중단했으며 추가 확대 계획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액 2위인 롯데카드는 상황을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다는 입장이다.
홈플러스는 2020년 초부터 현대카드, 롯데카드, 신한카드 등 주요 신용카드사들과 구매카드 이용 계약을 체결하고 일부 협력업체에 대한 물품 대금을 결제해 왔다. 홈플러스가 구매카드를 이용해 협력업체 물건을 외상으로 구매하면, 카드사는 협력업체에 구매대금을 현금으로 지급한다. 이때 카드사는 홈플러스의 매출채권을 보유하게 된다.
이후 카드사는 현금 확보를 위해 이 매출채권 일부를 증권사를 통해 현금화했고, 증권사는 해당 채권을 기초 자산으로 사채를 발행해 일반 투자자에게 판매했다. 추후 홈플러스가 카드이용대금을 납부하면 투자자들에게 원리금으로 상환하는 구조다. 그러나 경영난에 빠진 홈플러스가 카드대금을 지불하지 못하면서 해당 채권 투자자들이 대거 손실을 보게 됐다. 손실 규모만 4,300억원에 달하는데, 카드사 중에서는 구매카드 채권을 절반 이상 유동화하지 않은 롯데카드가 793억원에 이르는 부실을 떠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침체로 경영난을 겪는 기업까지 늘어나자 카드사의 전략도 바뀐 것으로 분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