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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중 패권 경쟁의 반사이익으로 인도의 위상이 급변하고 있다.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으로 성장한 인도가 ‘포스트 차이나’를 넘어 ‘기회의 나라’로 부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에 글로벌 기업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인도에 쏠리고 있다. 일찍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들이 인도 시장 공략을 위해 현지화 맞춤 전략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애플, 테슬라 등도 새로운 거점으로 인도 시장을 겨냥하며 탈중국 행보를 보이고 있다.
모디 印 총리 “지금은 인도의 순간”
인도는 탄탄한 인구 구조와 이를 기반으로 한 높은 성장성에 많은 기업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시장이다. 생산 거점 마련을 목적으로 공장을 짓거나 인도 소비 시장에 전략 상품을 출시하는 식이다. 인도 시장에 상품을 판매하려는 기업이라면 ‘현지 맞춤형 마케팅’이 필수다. 인도에는 ‘파이사 바술(Paisa Vasool)’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이는 지불하는 돈(Paisa)에 대한 보상(Vasool)이 확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즉 가성비를 추구한다는 의미다.
세계 경제 둔화 흐름 속에서도 매년 6%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인도가 오는 2027년 일본, 독일을 제치고 G3에 등극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같은 성장세는 구매력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14억 명이 넘는 인구 대국 인도는 2025년까지 중산층이 5억4,7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중위연령 또한 중국보다 10년 젊은 28세로, 최신 기술에 대한 수용성도 훨씬 큰 편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지난 3월 열린 인도 투데이 콘클라베 2023(India Today Conclave 2023) 행사에서 지금이 ‘인도의 순간(India's Moment)’이라고 밝힌 배경에도 이같은 자신감이 내포돼 있다.
인도 경제모니터링센터(CMIE)에 따르면 지난해 인도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전체의 67.3%에 달하며, 이 가운데 25세 이하 인구만 47%로 절반에 가깝다. 이같은 경제활동인구의 증가는 인도 소비시장의 확대와도 같은 의미다. 하인환 KB증권 연구원은 "젊은 생산가능인구가 많아지고 중산층이 증가하면서 인도 소비시장에 큰 기회가 열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인도의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에 비해 구매 결정이 빠르며, 온라인 구매 또한 활발하다. 이들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세부 스펙을 조사하고, 매장에서 실물을 보고 구매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을 활용한다. 또한 젊은 세대는 브랜드보다는 제품의 가성비, 내구성, 제품의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 인도 전용 모델: 갤럭시 M, F 시리즈
시장조사업체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인도의 스마트폰 판매량은 1억5,900만 대로 중국에 이어 2위며, 이 중 약 80%가 30만원 이하 제품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이 위축된 가운데 인도만이 나 홀로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최근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은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지난해 최저 출하량을 기록하는 등 판매 부진을 겪고 있다. 이같은 침체 속에서도 인도 스마트폰 출하량만 전년 대비 7% 증가하는 등 홀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의 인도 스마트폰 시장에서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인도에서 갤럭시 Z플립5, Z폴드5와 함께 보급형 모델인 갤럭시 M과 F 시리즈 신제품을 선보였다. 플래그십(최상위 기종) 스마트폰과 함께 보급형 스마트폰 기종을 다각화하는 투트랙 전략을 통해 14억 인구를 사로잡겠다는 구상이다.
갤럭시 M과 F시리즈는 오직 인도에서만 출시하는 현지 맞춤형 모델이다. 삼성전자가 특정 국가만을 타깃으로 별도의 라인업을 생산하는 곳은 인도가 유일하다. 가격도 128GB 모델의 경우 1만6,999루피(약 27만114원)로 상당히 저렴해 ‘극강의 가성비폰’으로 불린다.
가성비를 중시하는 인도 소비자들을 겨냥한 삼성의 전략은 적중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인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18%의 점유율로 3개 분기 연속 1위를 수성했으며, 중국 비보(17%), 샤오미(15%), 리얼미(12%), 오포(11%)가 그 뒤를 이었다.
삼성전자가 인도 시장에 이토록 공을 들이는 이유는 인도가 삼성전자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선점과 통신 장비 영향력 확대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시장인 중국에서 현지 제조사들과 애플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두 번째로 큰 인도 시장만큼은 쉽게 내줄 수 없다는 각오로 시장 공략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한편 애플도 인도 시장 공략에 시동을 걸었다. 애플은 인도 현지 공장 생산량을 당초 계획보다 25% 늘렸고, 지난 4월에는 인도의 수도인 뭄바이에 애플스토어 1호점을 개장하기도 했다. 최고가 프리미엄 정책을 고수해 오던 애플도 인도에서만큼은 중저가 모델인 SE 시리즈를 집중 투입해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약 40만원 내외의 SE 모델은 인도 소비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가성비가 좋아 인도 시장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에 따라 과거 2%에 불과했던 아이폰 점유율은 SE 모델 출시 이후 5%까지 상승했다. 애플 역시 삼성과 마찬가지로 플래그십과 보급형의 투트랙 전략을 통해 애플 생태계를 넓혀 가고 있다.
현대자동차 인도 전용 모델: 크레타, 쌍트로
현대자동차 역시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케이스다. 지난해 인도에선 총 476만 대의 신차가 판매됐는데, 이는 중국(2,320만 대)과 미국(1,420만 대)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인구 약 14억2,863만 명으로 세계 최대 인구 대국으로 올랐지만 가구당 자동차 보유율은 8.5%에 불과해 성장 잠재력이 크다.
현대차의 인도 판매를 견인한 건 i10, i20, 크레타, 쌍트로와 같은 현지 전용 차종들이다. 현대차는 한국 판매 차량을 그대로 들여오지 않고 인도 시장에 맞게 전략형 소형 모델을 새로 제작했다. 2007년 출시된 i10은 현대차 최초의 해외공장 전용 모델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전략 차종은 2015년 출시된 크레타다. 크레타는 소형 SUV지만 5명이 탈 수 있는 넉넉한 실내와 각종 편의 사양 덕분에 특히 인도의 젊은 가족들이 선호하는 모델이다. 지난해 총 14만895대가 판매된 크레타는 인도 공장 생산량의 27.9%를 차지하고 있으며, 올해 6월 말 기준 누적 판매 대수는 90만 대를 넘어섰다.
이어 쌍트로의 경우 현대차의 인도 진출 이후 초기 성공을 이끈 일등공신이다. 가격대는 38만9,900루피∼56만4,900루피(약 600만원∼900만원)로, 1998년부터 2017년까지 17년 동안 인도에서만 무려 132만2,336대가 판매됐다. 2018년 출시된 2세대 모델까지 합산하면 인도 시장 누적 판매 대수는 147만3,233대에 육박한다.
인도 현지의 높은 기온, 열악한 도로 여건, 저가 모델 선호 등 인도 시장의 특성을 고려한 모델을 개발·출시한 것이 인도 시장에 제대로 먹힌 것이다. 현대차는 이같은 철저한 현지화 효과로 인도 최대 자동차 제조업체 마루티 스즈키에 이어 시장 점유율 2위 기업에 오를 수 있었다.
최근 현대차는 인도형 전기차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도 시장의 전동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금도 소형차는 29%, 크레타는 45%까지 나오지만, 전기차는 5% 수준으로 낮다. 지난해 산업 수요 380만 대 중 전기차 판매 비율은 1%(약 4만 대)에 불과하지만, 올해는 10만 대 정도로 예측됨에 따라 인도형 소형 전기차 개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앞다퉈 인도 시장에 맞춤형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그간 인도에 진출하지 않았던 미국 테슬라도 발을 뻗었다. 지난 6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모디 총리의 비공개 회동 이후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현재 테슬라는 인도에 연간 50만 대 규모의 전기차 생산 공장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인도 정부와 협상하고 있다. 현재 인도 정부는 테슬라 공장 유치를 위해 전기차 수입세를 인하하는 방안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메르세데스-벤츠와 BMW도 인도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방침이다. 벤츠는 오는 2025년 전까지 인도에 전기차 3~4종을 새로 출시한다는 포부도 밝힌 상황이다. 인도 시장 선점을 위한,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