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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겨냥 반도체 규제 강화 움직임
AI 수출 막고, 기술 동맹 재편
중국은 반도체 자립 가속 대응

첨단 기술 분야 내 자국의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약이 중대한 분기점에 직면했다. 미 상무부가 중국에 반도체 제조 장비 및 기술을 불법 수출한 기업들에 대한 조사 결과 발표를 앞두면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이번 조사가 글로벌 기술 무역 구도를 재편하고, 관세와 인공지능(AI) 거품 논란으로 몸살을 앓는 금융시장에 또 다른 충격파를 던질 전망이다.
낙관론 주인공 AI 관련주 가격 향방에 이목
28일(이하 현지시각)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미국은 이번 조사에서 첨단 반도체 기술이 수출통제법을 위반해 중국 기업에 이전됐는지를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결과는 8월 초 발표될 예정이며, 민감 기술을 수출한 주체와 이들에게 부과할 제재 여부 또한 발표대상에 포함된다. 당국은 위반 사실이 드러날 경우, 엄중한 조치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외국의 기술 도둑질로부터 미국을 지키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이 있었던 만큼 이번 조사 결과 발표는 표면적인 수준에 그치진 않을 것이란 게 미국 산업계 전반의 관측이다.
이에 다수의 기술 기업과 이들 기업에 자금을 투입한 투자자들까지 긴장하는 모양새다. 가장 민감한 분야는 단연 AI로, 엔비디아 같은 기업들은 중국에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판매하며 큰 수익을 거둬 왔다. 그러나 이번 조치로 규제가 한층 강화되거나 과거 행위에 대한 소급 제재가 가해질 경우, 그 여파는 막대할 것이란 우려다. 나아가 중국 시장에 대한 노출이 큰 AI 관련 주식 가격이 급락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AI 전문 분석기관 AI인베스트는 “AI 붐으로 반도체 주가가 급등했지만, 미국의 정책 변화는 낙관론을 공황으로 바꿀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정학적 이해관계에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은 단순히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넘어 국제 무역 질서를 새롭게 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중국 관세는 이 같은 전략의 지렛대로 여겨지며, 이번 조사 결과에 따라 미국 경제 전략의 방향은 더 크게 요동칠 전망이다. 현재 미국 내에서는 중국과의 탈동조화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과도한 조치는 공급망을 붕괴시키고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앞에선 반격, 뒤에선 자립에 속도
업계는 중국의 놀라운 회복력을 주목했다. 미국의 제재가 강화되는 가운데서도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놀라운 회복력과 적응력을 보여줬다. 유럽의 중국 전문 싱크탱크 차이나 옵서버스는 “중국은 자국 반도체 생태계를 자급자족 체제로 전환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이는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통합반도체산업투자기금, 일명 ‘빅펀드’를 통해 제조 능력 확대에 힘써 온 결과”라고 평가했다.
중국 정부 또한 반도체 자립을 위한 다각적 접근을 강조했다.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듯 상하이에서 열린 ‘2025 세계 AI 회의’에서 중국 업체들은 정교하게 다듬은 리소그래피 기술과 새로운 반도체 설계 방식 등을 선보였고, 앞다퉈 자국 내 생산시설 확충 소식을 알렸다. 한 발표자는 “5나노 벽은 종착점이 아니라 이정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난도 미세공정에서 자국 산업의 한계는 인정하되, 전반적인 진로를 명확히 하고 가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대응 차원을 넘어 혁신과 자구책으로 외부의 견제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미국이나 네덜란드 등 주요국 기술에 의존하며 상황이 변화하길 기다리기보다는 자국 산업계와 학계가 긴밀히 협력해 기술 역량을 끌어올리겠단 구상이다. 이는 중국 반도체 산업계 전반의 청사진으로, 심지어 SMIC 같은 국영 대기업조차 자사의 사업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운영 방식을 재정비하는 데 한창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대응 또한 다각화되고 있다. 기존의 고율 관세나 수출 금지 조치를 넘어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게 대표적이다. 해당 전략의 핵심에는 글로벌 반도체 제조의 핵심 축으로 부상한 대만이 자리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중국의 첨단 제조기술 접근을 제한하고, 대만은 중국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게 양국의 판단이다.
문제는 이러한 동맹 전략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가 미국과 대만의 반도체 협력 강화를 도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에서의 경제적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유럽·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 전선에 발을 들이면서 상황은 점점 꼬이는 형국이다. 미국과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이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택한 이들 국가로선 자칫 섣부른 판단으로 기술과 자본, 핵심 부품 접근권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

기술 넘어선 권력의 문제, 주도권은 어디에?
업계에선 미국 정부가 고대역폭메모리(HBM)나 첨단 리소그래피 장비 등 특정 하드웨어에 대한 수출 제한을 강화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는 분위기다. 이들 장비는 대형 AI 모델 훈련과 데이터센터 운영의 핵심 기술로, 자연어처리, 자율주행, 감시 시스템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된다. 이는 다시 말해 중국의 AI 성장세와 야망 또한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기술 양극화 또한 심화할 공산이 크다. 미국과 동맹이 주도하는 AI 영역과 중국과 주변국이 주도하는 또 하나의 영역으로 세계가 나뉠 경우, 중복 인프라와 이질적 표준, 비용 증가 등 다양한 문제가 따른다. 전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영위하는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는 운영 복잡성과 규제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시장인 아시아를 놓을 수 없으면서도 미국의 제재 아래 놓인 엔비디아, AMD, 인텔 등 기업들로선 심각한 문제다.
중국 기업들도 생존을 담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첨단 반도체에서 차단되면 AI와 핀테크, 헬스케어, 국방 등 모든 분야의 성장에도 제동이 걸린다. 일각에선 화웨이, 알리바바 같은 기업들이 자체 설계 칩 실험에 나선 만큼 중국의 기술 혁신이 가속할 것이란 관측도 나오지만, 비용과 공급망 비효율 등 선행 과제 또한 산적해 있어 이 또한 쉽지 않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 상무부의 조사 결과 발표는 하나의 결론인 동시에 또 다른 갈등의 시작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면 중국의 보복 조치가 뒤따르고, 이는 AI 투자 환경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반대로 제재 강도를 낮추면, 트럼프 대통령이 거듭 강조해 온 핵심 공약에서 물러섰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한 태도를 ‘과도한 조치’라고 비판해 온 반대론자들에게도 비판의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흐름 속에서 AI와 반도체 규제는 더 이상 특정 산업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협업의 영역이었던 이들 분야는 이제 미국과 중국의 국가 정체성, 경제 안보, 외교 전략의 중심으로 부상하며 지정학적 경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제재는 권력의 문제로 정의할 수 있다. 누가 주도권을 갖고 흐름을 통제할 것냐에 대한 문제이며, 어느 쪽이 미래의 규칙을 만드는가에 대한 이야기다.